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서 여러 골키퍼들의 신들린 선방 장면을 보면서 필자의 어릴 적 우상이었던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이 생각났다.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치장했던 야신은 철벽방어를 보여주며 세계 골키퍼 역사에서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필자가 야신을 처음 본 것은 1970년 멕시코월드컵 대회였다. TV중계를 통해 본 야신은 당시 브라질 펠레, 포르투갈 에우제비오, 독일 베컨바우어와 함께 최고의 우상이었다.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당시 우승팀이었던 브라질과의 예선 경기에서 온 몸으로 브라질 공격을 막아내며 주목을 받은 이후 야신은 러시아팀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면서 1971년 은퇴할 때까지 골키퍼로는 사상 처음으로 유럽 축구 최우수 선수상인 발랑도르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했었다. 국제축구연맹은 1994년 미국월드컵부터 시상을 시작한 골키퍼 부문을 야신의 이름을 따 야신상으로 부르다 지난 남아공대회부터 골든 글러브로 이름을 바꾸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선수 은퇴 이후 사고로 양다리를 자른 야신은 골키퍼는 골을 먹는 게 괴로워야 한다. 골을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에게는 어떤 미래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모든 골키퍼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서 미국의 팀 하워드, 네덜란드 팀 크륄, 코스타리카 케일러 나바스, 알제리 라이스 음블리, 멕시코 기예르모 오초아 등의 신들린 듯한 선방은 세계 축구팬들을 한 눈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워드는 벨기에와의 16강 경기에서 전후반 90분 동안 23, 연장전까지 포함 총 39차례 벨기에의 슈팅을 막아냈다. 연장전에 2골을 내주며 미국팀이 1-2로 패했지만 하워드가 기록한 16차례의 세이브는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이후 한 경기 최다 기록으로 남게 됐다. 하워드는 미국에서 대통령에 못지않은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일약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코스타리카의 8강전에서 연장전까지 득점 없이 무승부를 기록한 네덜란드는 연장종료직전 투입된 팀 크륄이 코스타리카 2명의 페널티킥을 막아내 4-3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마지막까지 교체카드 1장을 놓고 고심했던 네덜란드 루이스 판할 감독은 모든 골키퍼에게는 특기가 있는데 크륄이 승부차기에 더 적합한 골키퍼라고 봤다며 야스퍼르 실레선 대신 그를 기용하는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맛봤다. 나바스, 음블리, 오초아 등은 비록 팀은 16강 또는 8강전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소속팀이 공격을 훨씬 많이 당하는 상황에서도 어려운 볼을 멋지게 막아내며 많은 주목을 끌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골키퍼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공인구 브라주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역대 월드컵 공인구 중 조각 수가 가장 적고 원 형태에 가까운 브라주카는 킥 정확도가 높고 슈팅 속도가 20% 이상 빨라져 골키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또 수비형에서 공격형으로 미드필더 운영의 변화가 두드러지며 각 팀의 공격력이 불을 뿜게 되면서 골키퍼들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다는 설명도 보태졌다.

골키퍼의 역할은 경기의 향방을 좌우하는 최후의 포지션이라는 점에서 이번 월드컵은 다른 어느 대회보다도 그 중요성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한 때 최고의 골키퍼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1962년 칠레월드컵 콜롬비아전에서 이례적으로 인간적인 행위(?)로 무례 4골을 허용해 비난을 받기도 했던 야신이 이후 골 먹는 게 괴로운 골키퍼를 위한 명언을 했던 것을 새삼 반추해보게 했다. 비단 축구 골키퍼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큰 실수를 하고도 뻔뻔스럽게 변명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말이다. 축구는 정직한 운동이고, 골키퍼는 그 정직을 온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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