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시대에도 왕이라고 해서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언관(言官)을 두어 왕이 경우에 맞게 행동하도록 했다. 통치이념인 유교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선 민심을 잘 살펴야 했고, 언론제도는 민심을 왕에게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언관은 고려시대에 생겨났고, 조선 때에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三司)가 언론의 역할을 했다.

언관이 민심을 살펴 건의하면 왕은 반드시 답을 해 주어야 했다. 이것을 비답(批答)이라 했다. 왕이 비답을 해 주지 않으면 계속 건의를 올렸고, 비답이 부당하다고 여겨지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왕은 밤잠을 설쳐가며 건의문을 읽고 비답을 작성해야만 했다. 왕은 비답 때문에라도 게으름을 피울 겨를이 없었다.

언관들은 왕의 여자 문제나 지나친 음주가무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간섭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왕들은 언관들을 매우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연산군은 바른 말 하는 언관들을 아예 죽여 버리기도 하였으니, 언관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진 자리였다. 입 바른 소리를 업으로 삼다 보니 적들을 많이 만들게 되고 그 때문에 정승이 되려면 언관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돌았다.

언관을 통하지 않고 왕에게 건의하는 길도 있었다. 상소가 그것이다. 글을 쓸 줄 알아야 상소를 할 수 있었던 만큼 양반이나 선비들이 주로 상소를 올렸다. 개인이 단독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상소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병인양요 이후 경상도 유생 이만손을 비롯한 만여 명이 연명(聯命)으로 상소문을 작성하고 서양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상소를 올렸는데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면 대궐 앞에 자리를 깔고 엎드려 상소했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자 전국의 유생들이 대궐 앞으로 몰려가 자리를 깔고 상소했지만, 포졸에 의해 해산 당했다. 상소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면 도끼로 목을 쳐 죽여 달라는 뜻으로 머리맡에 도끼를 놓고 상소하기도 했다. 고종 때 최익현은 광화문 앞에서 도끼 상소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태종 때는 글을 몰라 상소하기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신문고를 만들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대궐 앞 북을 쳐 호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문고를 통해 더러 억울한 사건이 해결되기도 하였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악용되는 사례가 늘면서 흐지부지 되었고, 연산군은 북소리가 듣기 싫다며 신문고를 아예 없애버렸다. 이후 신문고가 없을 때 격쟁(擊錚)이라 하여 꽹과리를 치게 하였다. 하지만 궁궐 안에 들어와 꽹과리를 치는 사람이 많아지자 궁 안에서는 꽹과리를 못 치게 하였다. 임금이 궐 밖 행차를 할 때면 곳곳에서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얼마 전 청와대 근처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들이 기초연금 혜택 수여를 촉구하며 도끼상소 퍼포먼스를 벌였다. 퍼포먼스라고는 하나 그 절박함은 실제 도끼 상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하소연 하지 않으면 안 될 아픈 사연들이 많은 세상이다.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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