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월드컵이 어느 때보다 재미있다. 우리나라 경기만 놓고 보면 답답하지만 대회 전체를 보면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골이 많이 나오니 재미가 있다. 공격 축구를 추구하는데다 볼의 탄성이 좋아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역시 축구는 골 맛이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TV 중계기술도 축구의 재미를 더한다.

캐스터와 해설자도 중계 채널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화면구성 등 기술적인 면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중계 팀의 성향과 색깔에 따라 채널을 고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빅 이벤트를 앞두고 각 방송사에서는 인기 해설자와 캐스터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다.

지금은 캐스터 한 명에 해설자가 두 명씩 붙어 중계한다. 차범근 차두리 부자와 송종국 안정환 해설위원이 대표적이다. 그만큼 해설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이야기다. 시청자들로선 다양하고 풍부한 해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할 수밖에 없다.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며 쌓은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 정확한 경기분석과 설명이 신뢰를 준다. 여기에 예능인 뺨치는 재치 있는 입담도 귀를 즐겁게 한다. 비장한 표정과 진지한 말투로 중계를 하던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방송중계에도 탈권위 바람이 부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1927년 8월 28일 경성방송국에서 라디오 중계한 경일야구쟁패전이다. 경성방송국은 그해 2월 일제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이 때 야구 중계방송은 일본어로 해야 했다. 제 나라 말도 맘대로 쓰고 듣지 못하는 눈물 나는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야구 인기가 높아 야구소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어 내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축구가 중계방송된 것은 1931년 경성제대와 큐슈제대의 경기다. 이때도 일본어 방송이었다. 1933년 4월 14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일본 전수대학과 조선 선발팀 간의 권투 경기가 우리말로 한 최초의 스포츠 중계방송이다. 당시 중계를 맡았던 박충근 아나운서가 최초의 우리말 스포츠 캐스터인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중계방송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었으나 일본어 방송을 우리말로 번역해 중계한 것이었다. 우리말로 단독 중계한 최초의 해외경기는 1948년 7월 열린 14회 런던올림픽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나운서가 해설자 역할까지 다 했다. 하지만 아나운서 혼자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두 명의 아나운서가 함께 중계하기 시작했다. 야구 중계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아나운서가 해설과 캐스터 역할을 나눠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민간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전문 해설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방송사마다 전속 해설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초기 스포츠 중계는 캐스터가 주도하고 해설자는 쉬는 시간이나 작전 시간 등에 간간이 끼어들어야 하는 보조적 위치였다. 하지만 요즘은 캐스터와 해설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동등하게 중계한다. 하지만 해설자의 도가 넘는 ‘샤우팅’은 우리들을 불편하게 한다. 뭐든 지나치면 문제다. 안정환 위원의 말처럼 해설도 ‘달콤’해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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