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참전용사 허양렬 씨(오른쪽)가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인터뷰 도중 딸 허성희 씨에게 전쟁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허성희 씨는 전쟁가요 ‘전우가 남긴 한 마디’로 히트를 친 가수로, 데뷔 후 20년 만에 컴백해 현재 ‘독도찬가’라는 곡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훈장 없는 노병 허양렬 씨

[천지일보=김예슬·이경숙 기자] “전쟁 상황이 어땠는지는 전장에 나간 사람만 알지요. 팔공산과 영천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다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전우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게 제가 생전에 해야 할 일이죠.”

6.25전쟁 당시 7사단 5연대 2대대에 속해 대구팔공산전투와 영천전투에서 인민군과 싸우던 청년 허양렬(95, 남) 씨는 이제 왜소한 체구의 노병이 됐다. 그러나 6.25 64주년을 2주 앞두고 한 손엔 서류봉투를, 다른 한 손엔 지팡이를 움켜쥔 채 인터뷰 장소인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 나타난 허 씨의 모습에서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사명의 무게가 전해졌다.

허 씨가 귀중한 물건을 다루듯 건넨 봉투에는 그동안 정부에 올린 진정서, 건의서, 직접 겪은 6.25 전쟁 수기, 독립기념관 군번인수증, 참전용사증 등이 들어 있었다.

허 씨는 당시 속해 있던 부대의 명예회복을 위해 팔공산 전적비, 영천 전승비 건립을 정부에 요구하는 한편 자신이 진작 받았어야 할 훈장을 찾기 위해 수십 년째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전우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동료가 제일 잘 알잖아요.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어요.”

평양출신인 허 씨는 1947년 1월 조선국방경비대 보병 제1연대에 입대했다. 허 씨는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누는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 북한에서 가족까지 숙청당하자 1946년 말 월남했다.

그는 30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군에 자원했다. 허 씨는 월남한 뒤 얼마 안 있어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지했다. 그는 “먹고 살 걱정만 할 게 아니라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집 소식이 있을 때 뒤도 안돌아보고 입대했다”고 말했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1월에 그는 입고 있던 평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군 생활을 시작했다. 간단한 훈련을 마친 후 보병 제 1연대 1대대에서 수송부 근무를 하던 허 씨는 1948년 육본 정보국, 1949년 3월 전남 광주 제5사단 사령부, 서울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한 지 3년이 지난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난생 처음 휴가를 내고 광주에 머물러 있던 허 씨는 긴급소집 명령에 따라 곧장 부대에 복귀했다. 허 씨를 포함해 출병준비를 마친 5사단은 27일 밤 서울 용산 육군본부에 도착했다. 허 씨는 “이 자리가 이제는 이렇게 기념관으로 변해 사람들이 오고가니 감회가 새롭다”고 미소를 띠었다.

그가 치른 전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팔공산전투와 영천전투다. 허 씨는 마산에서 5개 사단이 7사단 5연대 2대대로 혼합 편성됐을 때 진주 탈환작전에 투입됐다가 대구 근교 팔공산 고지 탈환 작전에 참전하게 됐다. 당시 지휘관은 ‘우리가 죽을 자리도 여기고 살 자리도 여기다’라고 진두지휘했고, 허 씨를 포함해 팔공산에 투입된 전투대대는 ‘공격 앞으로’ 9번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고지는 탈환했지만 허 씨는 이 전투에서 전우 500명을 잃었다. 허 씨는 “당시 고지를 탈환하지 못 하면 교대를 안 시켜준다고 해서 죽기 살기로 싸웠다. 고지 탈환 후 점호한 결과 350명만 살아남았다. 이는 대대장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말을 이어가다 독립기념관 군번인수증을 꺼냈다. 허 씨는 군번이 특별한 이유에 대해 “팔공산에서 인민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다른 경비대 군인들은 살기 위해 군번을 버리거나 땅에 묻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에 걸고 있다가 1998년 6월에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허 씨 등 생존병사 350명은 고지 탈환 후 화양리에서 3일간 휴식을 취한 뒤 500명의 병력을 보충 받아 다시 영천시가전에 참전했다. 그는 “그 당시 영천시가전의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뀔 정도로 전쟁이 치열했다. 밀고 밀리다 막판에 승리를 하고 큰 전투 없이 평양으로 진격했다”며 “당시 상황을 겪어보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두 전투를 겪으면서 같은 대대에 속해있던 전우들을 많이 잃었지만 아직까지 소속 부대를 기리는 비가 건립되지 않아 안타까워했다. 이에 군 당국에 수차례 건의서도 제출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받지 못한 훈장도 그가 살아있을 때 꼭 되찾아야 할 또 다른 이름이다. 수송병이던 그는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 군 차량을 잃었기 때문에 팔공산전투와 영천전투 당시 20~30년 된 노후 민간 차량을 끌고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전쟁터에서 그는 노후차량으로도 전투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훈장 두 개, 적군의 공격으로 밤중에 후퇴하던 중 차량 9대를 구했다는 점에서 훈장 한 개 등 모두 3개의 훈장을 받게 됐다.

허 씨는 “전장에서 수송차량은 군인의 전투식량과 탄창, 기동력을 책임지고 있다”며 “내가 살자고 수송차량을 포기하면 수백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는다는 생각에 적의 공격 속에서도 마지막 차량까지 전부 후진해 빼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허 씨에 따르면 적의 공격으로 훈장 상신이 기록된 서적과 기록관의 행방이 불분명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훈장 상신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전쟁 상황을 수기로 기록해 관계부처에 제출도 해봤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다.

그는 “훈장에 욕심은 없지만 전쟁 당시 태극기를 잠깐 들고 있었다는 이유 등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서 내 명예를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노병의 마지막 소원을 군 당국이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내비쳤다.

인터뷰를 마친 후 딸의 부축과 지팡이를 의지한 채 돌아서는 훈장 없는 노병의 뒷모습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느껴졌다. 하나의 훈장이 그의 노고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그토록 바라는 훈장은 전우를 위한 희생정신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깃들어 후대에 기억할 만한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