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를 가졌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핵문제를 언급, “핵실험을 또 한다면 북한이 사실상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은 계속해서 북한에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추가 핵실험은 역내에서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힘들게 되는 등 역내 안보 지형에 상당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말은 일단 원칙론적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하는 대신 박 대통령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독일 드레스덴 구상에 호응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주기를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WSJ는 이 언급이 한반도 주변국들이 참여하는 6자회담의 완전한 종료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고 주목했다.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일본과 한국의 소수 정치 그룹이 그간 북한에 대한 억지력을 위해 핵무기 도입을 촉구해왔다고 소개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이는 우리도 핵무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 당연한 언급이다. 북한이 핵개발을 계속하는데도 불구, 한국과 일본이 비핵화를 계속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상대가 칼을 들고 덤비는데 맨손으로 계속 벌거벗고 서 있어서야 되겠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국침략을 획책하고 있음에도 이를 간과하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했던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이 생각난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라도 없었다면 이 산하가 어떻게 됐을까.

1991년에 남북한이 한반도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할 때만 해도 한반도에는 훈풍이 감돌았다. 그러나 북한은 1993년에 NPT 탈퇴를 전격 선언했다. 이어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북한 강석주 대사 간에 지루한 핵회담이 계속됐다. 이 때 회담을 취재하던 필자가 논리를 떠나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 있었다. 기자의 육감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은 북한이 핵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일 아니냐는 것. 그 후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가 도출됐다.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개발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 및 핵투명성 확보라는 큰 성과를 냈다고 이를 자평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주역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지금은 실패를 자인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찾아 지난 20년간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위협을 줄이는 데 실패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은 최대 8개의 핵무기에 쓰일 수 있는 2040의 플루토늄을 축적했다이로써 동북아 국가들이 핵 비보유에 대해 재검토를 할 것이고 결국 핵비확산체제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뒤늦게 지적했다. 미국은 순진했고, 북한을 너무 몰랐던 것 아니겠는가.

한반도의 외교풍향이 여러 갈래로 엇갈리고 있다. 우리가 짚어봐야 할 외교적 셈법도 복잡다단하기만 하다. ·미 간에 6자회담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중국은 거의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주장하는 반면, 미국은 종전보다 더 강경론을 고수하는 느낌이다. 전제조건의 충족 없는 6자회담 재개는 절대 무의미하다는 것. 한국은 때마침 시진핑 중국 주석의 국빈방문을 앞두고 있다. 이런 때 중국이 민감해하는 미사일 방어(MD) 문제를 놓고 미국이 한국을 압박하면서 한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사드 빅딜설도 재점화되고 있다. ·일은 갑작스럽게 밀월관계로 급선회했다. 일본은 북핵과 일본인납치문제를 별개로 다루기로 하고 북핵제재를 완화해 주면서 한미일 공조가 전반적인 난기류에 휩싸이게 한 것이다. 일본이 사실상 북핵을 인정하고 나선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는 실정이다. 한일관계에 냉기류가 여전하고, 미일관계도 삐걱거리고 있다.

북한은 ·경제 병진노선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런 북한을 향해 북핵 내려놓기만을 외치는 목소리는 왠지 공허해 보인다. 북한은 러시아 일본과 협상에 나서 소기의 외교적 경제적 성과를 올렸다. 북한은 양수겸장을 놓은 반면, 한국은 여태 비핵화선언‘5·24조치에 스스로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어 안쓰럽다. 남북관계가 앞으로도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상 초유의 외교적 시험대에 놓인 한국. 이제는 보다 창의적이고 지혜로운 통일외교정책과 북핵해법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다.

역할분담이 필요하다. 강온 양동작전이다. 최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발탁된 김관진 국방장관은 주로 위기대응쪽 일에 임무가 한정돼야 한다. 대신 국정원장과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등에 이른바 리버럴리스트가 등용돼 제 목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 한국 외교의 위기는 오히려 외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실리와 명분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무슨 뾰족한 대안이 없을까. 한국에는 장자방과 키신저 같은 위인이 왜 나오지 않는 걸까. 이런 물음과 함께 복잡한 한국외교를 음식에 빗대 다음과 같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중국인과 북한 사람이 좋아하는 만두와 평양냉면도 즐기고 미국인이 먹기 편한 피자와 일본인이 익숙한 일식도 함께 먹을 수 있는 한국식 퓨전식당, 어디 그런 식당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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