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서진 말기 북방민족이 중국에서 세력을 과시한 역사를 중국인들은 ‘오호란화(五胡亂華)’ 즉 다섯 종족의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힌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들의 편협한 사관에 불과하다. 북방민족을 끌어들인 장본인이 바로 중국인들이기 때문이다.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까지 중국으로 들어온 북방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흉노의 유연(劉淵)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여 국호를 ‘한(漢)’으로 정했다. 과거 흉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유방은 종친의 딸을 공주로 위장하여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냈다. 따라서 흉노의 지배층은 한황실의 외손인 셈이다. 유연은 이를 근거로 한왕조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그의 사후 후에 넷째 유총(劉聰)과 태자 유화(劉和)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종정(宗正) 호연유(呼延攸), 시중(侍中) 유승(劉乘), 위위(衛尉) 유예(劉銳)는 유총에게 불만이 많았다.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 그들은 유총과 종실의 친왕들을 죽이자고 유화를 설득했다.

“선제께서는 형세를 모르고 제왕(齊王) 유유(劉裕), 노왕(魯王) 유륭(劉隆), 북해왕(北海王) 유의(劉義)에게 금위군을 맡겨 궁성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초왕(楚王) 유총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근교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제대로 정무를 돌볼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조치를 취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유화는 호연유의 생질이었다. 외삼촌의 말을 믿은 유화는 밤중에 안창왕(安昌王) 유성(劉盛)과 안읍왕(安邑王) 유흠(劉欽)을 불러서 대책을 상의했다. 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선제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은 상황에서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려고 한다면 천하가 폐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소인배들의 참언을 믿고 형제를 불신할 때가 아닙니다.”

동석하고 있던 호연유와 유예는 좌우에 명을 내려 유성을 끌고 나가 난도질했다. 유흠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명에 따르겠다고 했다. 계획이 결정되었다. 다음날 유예는 유총을 공격했다. 호연유는 제왕 유유를, 유승은 노왕 유륭을, 전밀(田密)과 유선(劉璿)은 유의를 공격했지만, 전밀과 유선은 생각을 바꾸어 유의를 납치한 다음 유총에게 항복했다. 전밀과 유선의 항복 소식을 들은 유예는 유승, 호연유와 합쳐 유유와 유륭을 공격했다. 습격을 받은 두 사람은 피살되었다. 초전에 전과를 올린 유화는 병력을 집결하여 유총을 공격했지만, 유총의 반공을 받고 피살되었다. 유화가 죽자 금위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호연유, 유예, 유승은 차례대로 체포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며칠 후에 유총이 황제로 즉위했다.

호연유 등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사적인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대의명분을 세우지 못하고 지지 세력을 강화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회유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오히려 직언하는 유성을 죽이고 유흠을 협박하여 억지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했으면 그들을 믿어야 했지만 초전의 승리에 교만하여 유흠과 유안국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승산도 없는 짓을 시작한 주제에 아군끼리 서로 죽였으니 패하지 않았겠는가? 유화도 마찬가지였다. 적장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황제가 된 그는 옳고 그름도 파악하지 못하는 우매한 인간에 불과했다. 호연유의 무리가 형제지간을 이간질을 했을 때 유성과 유흠을 몰래 불러서 사실관계를 파악했어야 했다. 그러나 모의를 꾸민 자들과 함께 종친을 불렀으니 반대한 유성은 죽고, 유흠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채널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거나, 다양한 정보를 들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간질에 넘어간 그는 정적들을 제거하려고 조급히 서둘다가 혼전의 와중에서 죽고 말았으니 결국은 자업자득이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