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통일IT포럼 회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초빙연구원

 
최근 유럽사법재판소(ECJ)잊힐 권리를 처음 인정하는 판결로 미유럽 간 찬반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란 인터넷 공간에 올라와 있는 자신과 관련된 기록을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잊힐 권리의 근거는 정보주체의 자기 결정권으로 나에 관한 정보를 언제 어디에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공개하거나 처리할 것인지를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최근 스페인의 한 구글 사용자는 구글 검색을 하면 과거 경매에 올라갔던 자기 주택의 세부 정보를 알 수 있다며 해당 게시물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유럽 최고 법원인 사법재판소는 구글 등 인터넷 기업들은 인터넷에서 시효가 지나고 부적절한 개인정보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구글은 고객이 개인정보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링크를 마련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사실상 개인의 사생활 보호개인정보보호표현의 자유알 권리보다 더 우선시하고 정보주체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결정이다.

유럽연합(EU)2012년에 잊힐 권리를 규정한 정보보호법을 개정했다. 개인정보수집 및 처리 시 사전동의 획득 의무를 강화하고 개인이 자기에 관한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잊힐 권리를 보장했다. 인터넷 사업자가 정보삭제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100만 유로 또는 1년 매출액의 2%까지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판결로 유럽연합(EU) 28개국 5억 명의 주민에게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구글 등 인터넷 사업자는 물론 표현의 자유를 보다 중시하는 미국의 전문가나 단체의 반발도 크다. 자신의 기록을 삭제할 수 있도록 한 권리가 오래된 범죄기록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보를 없애는 용도로 전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구글 등이 주요 회원사로 있는 미국의 컴퓨터 및 커뮤니케이션산업협회는 성명을 내고 엄청난 규모의 사적 검열의 문이 열렸다정치인이나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판결로 정보삭제를 요구하는 건의 폭증으로 기업의 비용증가는 물론이고 어디까지 잊힐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호하다는 논란도 일고 있다.

인터넷에는 본인이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까지 속속 게시되어 있다. 일반인들은 무심코 올린 과거의 글 때문에 취업이나 승진 또는 개인사업에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더욱이 일부 사실과 다른 언론보도나 SNS 때문에 연예인 등 유명인은 물론 일반인까지 고통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의 현행법은 인터넷 게시물이 사생활 침해명예훼손이 있는 경우에만 포털업체에 삭제를 요청하면 포털은 게시물이 권리침해 여부가 불명확할 경우 30일 동안 해당 글을 보이지 않게 차단하는 임시조치를 할 수 있다. 특별한 이의제기가 없는 경우 30일이 지나면 해당 글을 삭제할 수 있다.

또한 현재 국회의원입법으로 인터넷 이용자가 인터넷서비스 사업자에게 자기와 관련된 개인정보 게시물을 삭제토록 요청했을 때 삭제하도록 하는 정보통신망법개정안이 국회에 제류 중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인터넷에 게재된 사적인 글과 사진 등의 정보를 개인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잊힐 권리를 법제화할 경우 표현의 자유알 권리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있다. EU도 언론보도와 역사통계과학연구에 필요한 잊힐 권리행사를 제한하고 있다. 개인의 사생활과 개인정보를 최대한 보호하면서도 표현의 자유, 알 권리 보호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제 우리도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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