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근래의 세월호 사건을 접했던 한국의 어머니라면 마치 내 자식을 잃은 듯 참담함과 미안함으로 가득한 슬픔을 공감했을 것이다. 한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더욱 밀착된다. 그리고 자라면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배가된다. 이런 관계는
위기에 봉착할 때 평소 숨죽이고 있었던 힘을 발휘하는 역사 속 어머니의 행보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나라의 통치권이 빼앗기고 식민지국으로 전락했을 때, 한국 어머니들은 구국 활동에 앞장섰다. 독립운동의 일선에 자식과 남편을 보낸 뒤, 가정을 책임지고 독립활동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의 대열에서 당당히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단지 내 자식만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뛰어넘어 내 조국을 찾겠다는 의지의 날 선 행보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주인이자 정신적 지주, 백범 김구 의사의 강직한 어머니로 알려진 곽낙원 여사(1859년 2월 26일~1936년 4월 26일)의 독립활동은 조국의 어머니, 그 자체였다.

곽낙원 여사는 1859년 황해도 장연군 목감면에서 출생해 14세에 남편 김순영과 혼인한 후 외아들 김구를 낳았다.

당시 신분차별과 가난 속에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들 김구가 한글과 한문을 익혀 견문을 넓히도록 조력했고, 신분사회의 모순과 부정부패에 반기를 들고 동학에 입교했을 때는 명주저고리를 지어주며 아들을 격려했다.

1911년에 김구가 비밀결사체 신민회 및 독립운동기지 창설과 독립군 양성으로 일경에 피체돼 징역 15년을 구형받았을 때도 곽낙원 여사는 하루 2번씩 옥바라지를 하며 생활비를 절약한 돈으로 권총 2자루를 선물하는 등 아들을 민족의 선각자로 일어서게 했다.

국외의 임시정부 활동에서 곽 여사는 임정 관련 독립활동을 위한 숙식제공 및 활동 뒷바라지를 하고, 독립운동가 부인들을 규합해 독립활동에 동참시키는 등 임시정부의 정신적 조력자로 자리했다.

시대 여하를 막론하고 위대한 어머니의 행적은 주목받고 있다. 곽낙원 여사는 아들 김구의 활동 경로에 동행하며 독립활동을 하는 여성독립운동가로 나라사랑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 백범 김구 선생(뒷줄 가운데)과 의자에 앉아 있는 김구 선생 어머니 곽낙원 여사 (사진제공: 백범기념관)

자식을 향한 어머니로, 조국광복을 향한 민족구성원으로, 목표의식을 부각하는 조력자의 역할을 서슴지 않았던 곽낙원 여사의 독립활동은 문학 속 중요한 역할자로 묘사되고 있는 클라바우터만(Klabautermann)을 상기시킨다.

과거 발트 해에서 선원이나 어부를 도와주는 가상의 요정, 클라바우터만의 역할은 일제강점기에 남편, 자식, 임시정부,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곽낙원 여사의 행적 속에서 묻어난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해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의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고 남긴 여사의 유언은 자기 죽음조차 민족독립을 향한 열망으로 귀결시켰다.

암울했던 민족의 기억을 뚫고 피어난 여성독립운동가! 역사의 뒤 안에서 소리 없이 헌신했던 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 독립운동가를 선각자로 일으켜 세운 어머니의 귀한 행적에서 대한민국 어머니, 그 힘의 원동력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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