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지난주 박지성의 전격적인 은퇴발표 직후 만난 모 중앙지 체육부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는 워낙 갑자기 은퇴발표가 나와 깜짝 놀랐다. 본인은 생각을 많이 했겠지만 발표 내용을 보니 은퇴이후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축구 지도자, 축구 행정가를 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히지 않고 7월 결혼 후 유럽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는 뜻만을 피력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유명 선수들이 은퇴 발표를 할 때, 팬들은 이별의 아쉬움과 함께 은퇴이후에도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들을 갖는다. 스포츠 애호가 입장에선 즐거움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기대감은 은퇴이후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박지성 이전 은퇴 발표를 한 피겨 여왕 김연아에 대한 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김연아의 경우 20대 초반의 나이로서 웬만한 직업에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나이에 은퇴를 발표해 큰 아쉬움과 함께 은퇴이후에 대해 많은 걱정들이 쏟아졌다.

박지성의 은퇴이후를 알고 싶은 것은 그를 아꼈던 팬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한국 축구를 위해 기여한 공로가 워낙 컸던 만큼 은퇴하고 나서도 새로운 분야에서 꼭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에서다. 불확정성을 역동성으로 바꾸며 축구인생에서 크게 성공한 박지성이 은퇴 후 다시 불확정성의 길을 걷게 됐지만 선수시절처럼 역동성 넘친 제2의 인생을 이루어낼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축구선수로서 미래가 불확정적인 박지성이 역동적인 선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이는 2010 남아공월드컵 대표팀 허정무 감독이었다. 박지성과 허정무 감독의 만남은 그의 축구선수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만했다.

박지성은 1999년 허정무 감독을 만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누구도 잘 알아주지 않는 무명선수였다. 당시 수원공고를 졸업한 박지성은 작은 키에 특출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출세코스인 연고대에 발탁되지 않고 명지대로 가야 했다. 올림픽 대표팀의 울산 전지훈련 중 울산 현대와 명지대의 경기를 우연히 지켜본 허정무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은 그의 잠재역량을 알아본 뒤 연세대 선배인 명지대 김희태 감독에게 올림픽 대표팀 차출을 부탁했다. 박지성은 1주일간의 테스트를 거쳐 기술위원회를 거치지도 않고 감독직권으로 최종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됐다. 만약 이때 허정무 감독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평범한 축구선수로 머물 수도 있을 뻔했다.

잘 알다시피 박지성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운 것은 2002 일월드컵 4강신화의 주인공 히딩크 감독이었다.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안고 있는 역대 월드컵의 한국인 감독과는 달리 히딩크 감독은 전력 극대화를 위해 무파벌 선발의 획기적인 시스템을 도입, 박지성을 당당히 주전으로 발탁했다.

박지성은 세계적인 강팀 포르투갈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멋진 월드컵 골을 성공시키며 4강 주역으로 활약한 뒤, 히딩크 감독과 함께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입단했으며, 이후 세계 최고의 명문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다. 그는 60여 년의 한국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선수로 기록됐다.

해방이후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며 불확정성을 역동성으로 뒤집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대한민국처럼 박지성도 처음에는 축구선수로서 성공하기 힘든 불확정성을 자신의 끈기와 집념, 노력 등으로 역동적인 선수가 됨으로써 가장 많은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 같다.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많은 고민 끝에 전격 은퇴를 선언하고 축구를 떠나게 됐지만 박지성은 제2의 삶에서 반드시 성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대한민국호의 상징처럼 된 박지성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야 대한민국의 미래도 낙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국가도 역동성을 보이다 미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불확정의 나락으로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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