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883년 9월. 미국 오하이오주 작은 마을 리베나(Revena)지방의 선교사 모임에서 한 노부인이 소액의 돈을 헌금했다. 그 노부인은 변방의 작은 나라인 한국선교활동에 바램을 담아 헌금했지만, 이를 계기로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 파견되었고 종교전파는 물론 한국근대교육기관 설립을 일구는 작은 씨앗이 되었다.

미국 북감리교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봉건제도하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국여성에 주목하며 이들에게 인간존중과 평등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선교에 주력했던 캐롤(A. Carroll)은 개성지역에 최초 기숙 여학교인 ‘개성여학당(1904년 12월 12일)’을 설립했는데, 바로 호수돈 여학교(1908년 교명 개칭)의 효시이다.

당시 호수돈 여학교는 4년제의 보통과와 3년제의 고등과로 설치되어 신여성교육과 남녀평등사상 등 의식화교육에 주력함으로써 한국여성의 시대변화를 인식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11년 조선교육령 발표이후, 일제의 식민교육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이 더욱 강화되자 이에 우리민족은 자주독립을 주창하는 전 민족적 3.1만세운동으로 저항했는데, 개성지역에서는 호수돈 여학교의 ‘호수돈 비밀결사대’가 주목된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호수돈 여학생의 주도로 조직된 비밀결사대였다. 권애라(權愛羅), 장정심(張貞心), 조숙경(趙淑景)이 핵심멤버로, 이향화(李鄕和), 권명범(權明範), 이영지(李英芝), 류정희(劉貞熙), 조화벽(趙和壁), 김정숙(金貞淑) 등이 주도했다.

당시 권애라는 호수돈 부속 남부소학교 교사, 어윤희(魚允姬)는 인근의 충교 예배당 전도부인으로 독립선언서 200장을 배포했던 교회청년 안병휘(安秉輝) 등과 긴밀한 교류를 하면서 호수돈 여학생의 3.1만세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저녁시간 교내 4층 기도실에서 밀회를 가지며 거사준비를 시작했다. 이들은 극비리에 기숙생 70여 명을 포섭해 연명선서를 만들었고, 커튼으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시위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거사일 3월 3일. 호수돈 비밀결사대원은 퇴학원서를 써놓고 아침 기도회를 향했다.

기도회를 마치자, 학생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헌병경찰서 앞으로 자연스럽게 행진을 하는데, 그때 한 학생들이 민족자결주의를 연설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기 시작했다. 이어 여학생들과 동조하는 개성시민은 순식간에 합세하며 1000여 명 규모의 군중으로 결집되었다.

이날 만세삼창의 외침은 일본 경찰과 개성시민의 충돌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민의 울부짖음으로, 개성시내의 허공을 메웠다. 그렇게 개성지역 만세외침의 시작은 바로 꽃다운 여학생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개성 여학생의 순수한 민족정신의 상징이다. 전통과 근대, 탄압과 저항 속 여학생의 외침이 일제 강압을 뛰어넘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민족저항운동의 시발점에 섰다. 바로 민족을 향한 순수함과 나라사랑정신이 함께 표출된 것이었다.

여학생 ‘호수돈 비밀결사대’의 행보는 또 하나의 광복을 향한 초석이 되었고, 나라를 사랑하는 순수했던 민족정신은 시대를 넘어서서 귀감이 되고 있다.

순수한 나라사랑정신, 그 시작과 실천에 제한의 잣대는 없었다.

▲ 호수돈 여학교 개성교사 (사진제공: 심옥주 소장)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