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청대의 통치자는 인재를 모집할 때 정기적으로 어전에서 회시(會試)를 보거나, 지방에서 과거를 보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고시가 있을 때마다 각종 정치세력들은 각축전을 펼치며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강희제 시대에 강남의 한 고장에서 향시가 시행됐다. 이곳에서도 탐관오리와 청렴한 관리, 순무와 총독, 만주족 관리와 한족 관리, 황제와 지방관 사이에 생사를 건 투쟁이 전개됐다. 순무 장백행(張伯行)은 대단한 기개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에 정확하고 숙련된 솜씨로 정의를 고양하고 황제의 권위를 지켜냈다.

강희 50년인 1711년 6월, 회시와 향시를 실시한다는 공고가 발표됐다. 그러나 강남에서는 불학무식하고 무능한 부호의 자제들이 합격자 명단에 올랐다. 격분한 응시자들은 고시장에 걸린 ‘공원(貢院)’이라는 편액을 ‘매관(賣官)’으로 고치고 고발장을 제출했다. 장백행은 직접 조사하여 부고관(副考官) 조진(趙晋)이 뇌물을 받아먹었으며, 정고관은 그의 권세가 두려워서 묵인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장백행은 즉시 관련된 관리들을 탄핵했다. 분노한 강희제는 상서 장붕핵(張鵬翮)과 시랑 혁수(赫壽)를 파견해 강남총독 갈례(噶禮)와 장백행을 만나 재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장붕핵과 혁수는 갈례가 초대한 잔치에서 종일 술을 마시며 놀았다. 잔치에서 갈례는 조진을 체포한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심문장에 끌려나온 조진은 갈례의 눈치를 살피며 모든 잘못을 시인했다. 장백행은 의심이 들었다.

장백행은 비밀리에 조진을 불러 뇌물을 바친 사람이 오필(吳泌)과 정광규(程光奎)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진은 통곡을 하며 가족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장백행은 탁자의 뒤에서 ‘뱀’이 은밀하고 의미심장하게 허벅지를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것이 조진을 협박하여 범인으로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밤샘 조사를 통해 그는 갈례가 조진의 가족을 협박한 사실을 밝히고 장붕핵과 혁수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갈례에게 접대를 받은 이들은 조진과 뇌물을 바친 고시생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다. 위기를 느낀 갈례는 오히려 장백행의 7가지 죄목을 열거한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동시에 장붕핵과 혁수도 상주문을 올려서 이 사건은 조진과 고시생 사이에 일어난 일이며, 갈례가 관련됐다는 것은 장백행의 무고일 뿐이라고 했다. 장백행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강희제에게 글을 올려서 뇌물사건에 관련된 관리들을 징벌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강희제는 직접 상서 목화륜(穆和倫) 등을 불러서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했다. 강남에 도착한 이들도 갈례의 후대를 받고 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붕핵과 혁수의 보고가 옳다고 주장했다.

장백행은 상세한 심리과정과 범인들이 직접 쓴 진술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강희제는 심복을 파견해 다시 비밀리에 조사했다. 그 결과 장백행의 보고가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강희제는 갈례 등을 법에 따라 처리하고, 장붕핵, 혁수, 목화륜 등을 강등시켜 경고를 하는 동시에 장백행을 상서로 임명했다.

강남의 과거시험장을 둘러싸고 펼쳐진 사건이 정치적 문제로 번지는 과정에서 강남순무 장백행은 원흉을 밝혀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일이 의외로 심각해져서 자신이 물릴 위기에 처했다. 그는 결국 사건의 실체를 모두 밝히고 진실을 천하에 알렸다. 그의 방법은 매우 치밀했다. 사건의 원인인 갈례를 노출시킨 그는 자신이 물릴 위기에 처하자 상소문을 올려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황제 강희제였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고시가 구조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진과 뇌물을 바친 고시생은 결국 작은 문제에 불과했으며, 보다 큰 문제는 청왕조의 고관에 의해 자행되는 구조적인 비리와 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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