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천재시인 엘리엇이 그의 시 ‘황무지(荒蕪地)’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읊었다. 그 잔인한 달에 일어난 황당한 참사 앞에서 국민은 할 말을 잃고 정부의 무정부 상황 같은 ‘국민안전’에 분노하며 자책한다. 그것은 꽃다운 젊음을 채 피우지 못하고 희생당한 생명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성이요, 사랑하는 혈육을 어이없게 떠나보내고 피눈물 흘리는 가족들에 대해 넘치는 미안함과 말과 행동으로는 이루 다 위로할 수 없다는 한계에 다다른 애달픈 심정에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당국의 수사와 언론 보도에서 드러난 내용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갖가지 사고 원인 가운데 책임 있는 자들의 기본적 직업윤리와 상식선의 행동만 있었더라면, 어느 분야 하나라도 제대로 안전 매뉴얼이 작동됐더라면, 이 대형사고는 미연에 방지됐을 테고 고귀한 생명들이 희생당하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터에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해 잔인한 사월의 비극을 맞고 있으니 생각할수록 비통하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도 이번 사고로 가족을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는 자들을 두 번 울리는 루머들과 비하하는 글과 말들이 따랐으니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이 같은 해상사고에 대한 정부의 백치(白痴) 수준의 허술하고도 안일한 대처능력과 이기적 사회가 낳은 엄청난 결과에 대해 희생자나 가족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함에도, 마치 기회인 양 고개를 쳐들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의 글과 말들은 우리 시대의 못난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터넷상을 통해 허위의 글들이 마구 쏟아진 가운데 대구에 지역구를 둔 여당 국회의원은 참사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려는 허위의 글을 올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었다. 또 ‘보수논객’으로 지칭되며 글 쓰는 자가 이번 사고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고 각색해 마치 불순분자들이 준동한 결과처럼 색깔론을 들먹이면서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데, 그런 일들은 글 쓰는 자들까지 부끄럽게 만들게 한다.

가족을 잃은 자의 심정은 그 아픔을 이미 겪어본 자들만이 알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초기에 어느 방송사가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로 아이를 잃고 뉴질랜드로 이민 간 김순덕(전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 씨와 인터뷰 내용이 방송된 바, 김 씨는 “15년 전의 그 상황으로 다시 가서 똑같이 겪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방송진행자가 ‘슬픔에 싸인 가족들에게 한 마디 위로해 달라’는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드릴 말이 없다”고 하면서 미안해했다. 경험상 그들에겐 지금 아무런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말은 때와 장소를 가려 상황에 맞추어 해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말과 글을 국어(國語)로 삼게 된다. 우리 국민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해서 학교교육을 통해 읽기, 듣기, 쓰기, 짓기, 말하기를 배우고 익히면서 사용해왔다. 초기에는 국어의 영역 중에서 쓰고, 읽고, 듣기 등 학습에 치중하지만, 점차적으로 사회활동을 통해 글짓기와 말하기 영역이 넓어져 개인의 능력차에 따라 그 수준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을 이룬다.

단순한 글자 쓰기가 아닌 글짓기와 읽는 게 아닌 말하기는 개인이 현실의 사상(事狀)에 대한 인지나 판단작용의 정도를 의미하므로 개인의 인격 평가기준이 된다. 때문에 가려서 말하고 신중하게 글을 써야 함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세 치 혀로 상대방을 상처받게 하고, 글로써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에서 공인이나 전문가의 공공연히 행하는 말이나 글 게재는 때론 독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장황하지만, 요체는 누구나 글 쓸 수 있고, 또 쓴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기나 편지글을 쓸 수 있고, 더 높은 수준에서는 문학에 대한 습작도 가능하다. 전문가와 같이 신문지면, 전문지 등 매체에서 글 쓸 공간이 없어도 개인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얼마든지 글을 쓰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관심이나 활동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공연성(公然性)이 가지는 글과 말의 사회 확장성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엔 유익하고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가 그들로 인해 가치가 고양되면서 건전한 사회를 이루게 되고, 사회인들은 그들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어 삶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힘들 때 위로받는 일들이 있을진대, 진중함 없이 막글과 험담을 즐겨하는 사람들이란 인간의 가치와 사회의 상식선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엘리엇의 ‘황무지’ 시 제목이 원래 ‘그는 서로 다른 목소리로 세상을 정탐한다’였으니, 잔인한 달의 그 두려움과 격앙이 물결치는 시간들은 빨리 지나가고 온기의 바람이 천지에 불어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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