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나라를 구하는 데 남녀의 구분이 없다.’

치열했던 역사의 흔적으로 기억되는 항일구국운동은 국권상실의 기로에서 국가 구성원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민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의병운동’은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역사를 부활시킨 항일저항운동의 주역이 민(民)이었음을 주목하게 했다. 그리고 당시의 제도, 계층, 신분, 성별을 뛰어넘었던 그들의 행보와 나라 사랑의 행적은 오늘날 ‘의병의 날(매년 6월 1일)’로 제정돼 기억되고 있다.

의병운동은 외세에 저항하는 의기(義氣)가 발동된 후 20년간 항일구국운동으로 전개됐는데, 그것은 조국의 현실을 대면하며 울분과 함성을 표출시켰던 민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발휘됐던 항전의지는 반세기 동안 항일투쟁을 펼치는 민족독립정신으로 계승돼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간이 됐다. 구국운동을 위한 치열함 속에서 목숨을 주저하지 않았던 수많은 의병과 독립운동가들 옆과 뒤에는 한국여성이 동행했다. 이처럼 국가위기 상황에서 한국여성은 늘 의로운 기지를 발휘해왔고, 의병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은 40여 년간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했던 한국여성의 대표인물이다. 윤희순(1860~1935)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안사람에서 ‘여성의병장’ ‘독립운동가’로 점차 그 활동 영역을 넓힌 여성구국활동가였다.

강원도 춘천에 시집온 후, 시백부인 의병장 유인석과 시아버지 의병장 유홍석, 남편과 더불어 4대에 걸쳐 민족독립정신을 계승하며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자처했다.

을미의병 시기에는 의병 활동 뒷바라지, 의병가사 제작과 배포 등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는데, 특히 ‘조선 선비의 아내’로 일본 대장에게 격문 <왜놈대장보거라>를 지어 보내는 등 적극적인 항일의지를 피력했다.

정미의병에서는 <의병군가> <병정가> <오랑캐들아 경고한다> 등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의병가사를 배포하고, 춘천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해 여성의병활동을 이끄는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한일병합 이후 윤희순 일가는 국외로 이주했지만, 윤희순은 서간도 환인현에 ‘노학당’을 건립하고 항일인재 양성을 위한 애국계몽 활동에 앞장섰다. 일제에 의해 폐교된 이후에도 ‘조선독립단’과 ‘가족부대’를 조직해 항일투쟁에 앞장서며 솔선수범하는 독립운동가이자 리더의 면모를 보여줬다.

“천 번을 넘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한민족의 원수를 갚고 우리 가족의 원수를 갚고 한국의 국권을 찾기 위해 지금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겠습니다…”라고 했던 그의 비장한 언설은 그의 투철했던 나라사랑과 민족독립의지를 확인시켜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각계각층은 ‘솔선수범’이라는 단어가 상실되고,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다. 이 시점, 여성의병장 윤희순! 그가 가슴에 품었던 조국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한국여성정신과 리더의 의미를 되뇌어본다.

▲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의 영정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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