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배가 아무리 좋아도 선장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그 배를 탈 수 없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 나가면 배는 크고 작고 간에 어차피 기상 상태와 파고(波高)에 요동치는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하다. 배는 파도의 율동에 따라 춤을 춘다. 파도가 거칠어지면 배가 추는 춤은 어지러워지고 승객은 멀미와 함께 불안,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럴 때 승객이 믿는 것은 바다를 잘 알 뿐 아니라 그가 모는 배를 잘 아는 선장이다. 배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첨단 장비에 의한 관측 시스템의 발달로 기상예보가 잘 들어맞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상예보가 항해에 부적절할 때에는 바다에 안 나가면 된다. 그렇더라도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하는 바다, 이른바 ’수능재주 역능복주/ 水能載舟 亦能覆舟’의 바다는 워낙에 변덕스럽다. 언제 기상이 돌변해 잔잔하던 모습이 험상궂게 변할지 모른다. 그럴 때에 4월 16일 진도 해역에서 침몰한 ‘세월호’처럼 복원력이 약하거나 속된 말로 ‘개념’ 없는 선장을 만난 배는 견디기 어려우며 승객은 위험에 빠진다.

더욱이 아무리 많이 다녀봐 익숙한 뱃길이더라도 암초가 널려 있는 캄캄한 바다 밑 사정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으며 거기에 ‘사리’와 ‘조금’에 따라 조류의 상태와 조류의 세기, 깊이가 달라지는 바다는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 바다나 육지에서 가까운 바다나, 항해는 항상 모험이다.

따라서 그 같은 모험으로 화물선이나 여객선,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으로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지배하는 나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항해의 모험을 결행하는 것은 용기이며, 항해에는 목적이 있기에 그 항해가 화물의 운반이든 승객의 이송이든 군사작전이든 고기잡이를 가든 책임 있는 직무의 수행이다. 그렇기에 그 직무를 책임 있게 수행하는 선장이나 선원에게는 그 노고 때문에 응분의 명예가 부여된다. 폭풍우를 만났거나 또는 어떤 돌발 사건으로 조난을 당했을 때 배에 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은 하늘 빼고는 선장뿐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일단은 죽든지 살든지 배를 탈출해야 한다. 그런 후 구명정에 몸을 싣게 되면 다행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물에 떠서 구조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부가 미로처럼 복잡한 배에서 탈출하는 일이 일반 승객에게는 쉬울 턱이 없다. 더구나 배가 기울면서 발 디딘 바닥이 갑자기 벽이나 천장으로 변할 수 있고 벽이나 천정이 발을 디뎌야 하는 바닥이 돼버릴 수 있는 아수라장 속에서 안내인 없이 배에서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혹여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선장이나 승무원이 자신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돼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애초부터 배에 타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바다 길이나 하늘 길을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배나 비행기가 현대 기술력으로 안전하게 만들어졌으며 실제 이용을 통해 검증돼온 것은 잘 알지만 승객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데는 선장이나 기장의 책임감과 그들에 대한 신뢰감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자신의 안위보다 승객의 안위를 위해 헌신한 선장이나 기장, 그 승무원들의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아왔다. 상징적인 것은 1백여 년 전인 1912년 4월 15일 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당시 세계 최고 최대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의 경우다. 물론 우리 국적기나 국적선의 경우에서도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떻든 스미스 선장은 끝까지 승객의 구조와 탈출을 돕다가 배에서 탈출하지 못한 승객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배가 빙산에 부딪친 것은 그의 과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나 승객의 안위를 앞세워 책임을 다한 죽음으로 그는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됐다. 사람은 어떤 직무를 맡게 되면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와 반대로 갈 수도 있으나 사람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 그것이 자연스럽고 보통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난당한 배에서 우왕좌왕하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승객들을 버리고 맨 먼저 선장이 도망치는 일은 차마 할 짓도 아니지만 그러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별난 짓을 세월호 선장이 저질렀다. 그것도 손자뻘, 증손자뻘 되는 어린 꽃봉오리들을 가라앉는 배에 남겨두고 뺑소니를 쳤으니 할 말을 잊게 한다.

안중근 의사는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바쳐라(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라고 말했다. 그 안 의사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나라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위해 희생, 헌신한 열사 의사들이 숱하게 많은 나라다.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물론 대외적으로 커다란 자랑이었거늘 그는 우리를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어 놓았다. 공사(公私)를 떠나 사람마다 맡은 소임을 책임 있게 수행하는 사람이 많아야 나라가 튼실해지며 불신이 가시고 신뢰가 가득한 사회가 된다. 승객을 버리고 자신만 살자고 맨 먼저 배를 떠난 세월호 선장의 경우에서 수치스러움을 느꼈거든 그것이 이 나라 지도자들을 비롯해서 가정과 사회 국가에서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면교사가 되어 새삼 자신의 소임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시에 세월호 사고와 같은 재난이 되풀이 되는 우리의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와 국가적 사회적 허술함이 쇄신돼야 하며 사고는 없어야 하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시스템을 완벽하게 정비함으로써 사고를 당했을 때 허둥대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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