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고고함의 상징인 학을 보기가 힘든 세상이다. 학을 닮은 사람은 더욱 보기가 어렵다. 긴 목을 똑바로 세우고 어지러운 세상에 차마 두 발을 담그기 싫어 한 발로 서서 청산을 바라보는 학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다. 주역의 61번째 괘인 풍택중부괘(風澤中孚卦)는 학의 모습에서 사회지도자를 형상화했다. 중부괘는 위에는 바람과 순종을 상징하는 손괘, 아래에는 물이 넘실거리는 못과 기쁨을 상징하는 태괘가 있다. 바람과 물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기뻐하는 화합의 장을 나타낸다. 더 살펴보면 상하에 각각 강함을 상징하는 두 개씩의 양효가 있어서, 가운데 있는 유순한 두 개의 음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강자가 약자를 진심으로 보호하고 있다. 약자는 강자의 보호에 기쁨으로 화답한다. 실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중부’의 ‘孚’라는 글자는 손톱을 의미하는 ‘爪’와 알이나 씨앗을 의미하는 ‘子’가 합쳐진 모습이다. 새는 발톱이 무기이다. 그것으로 먹이를 구하고 적과 싸운다. 그러나 알이나 새끼를 품고 있을 때는 아주 부드러운 손길로 변한다. 새끼에 대한 순수하고 경건한 사랑 때문이다. 어미 새의 발톱에서 믿음의 감동이 느껴진다.

중부괘의 괘사는 정성어린 사랑은 위로는 하늘을, 아래로는 돼지나 물고기에게도 감동을 준다고 역설한다. 국가 지도자가 정성을 다하면 국민이 감동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따른다. 나라를 이끄는 것이 어찌 쉬울까? 정치, 외교, 경제, 문화, 교육, 군사 등등 모든 분야가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물려 돌아가야 한다. 단순한 정성과 열의만으로 국가를 이끌지 못한다. 애매한 추상적 구호로는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반복되는 얕은 설교와 협박에 식상한 국민은 혐오감을 느낀다. 지도자의 지나친 오만과 고집은 국민을 등지게 만든다. 사심이 없을 때 국민이 공감한다. 공감이 없이 어찌 감동을 하겠는가? 공감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면 여론이 형성된다. 여론은 곧 국민의 힘이다. 그렇다면 여론은 어떻게 생성돼야 가장 바람직할까? 그 해답이 곧 중부괘 구이효에 있다.

“학이 그늘에서 우니 새끼가 화답을 한다. 내게 좋은 술잔이 있으니 그대와 좋은 술을 주고받으리라! 새끼의 화답은 어미의 부름이 좋은 둥지를 얻었다는 신호임을 알기 때문이다.”

고향집 뒷동산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어서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거기에 깃든 한 무리의 백학은 어지간해서 울지 않았다. 학보다 좀 작은 두루미는 늘 논바닥에 앉아 있지만 학은 그런 세속에 깃들지 않았다. 학은 늘 그와 어울리는 소나무에 앉아 있었다. 학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 울지 않는다. 그늘에서 울어도 자식들은 그 까닭을 잘 알고 대답한다. 참스승들은 아무 때나 입을 열지 않는다. 평소에는 학처럼 유유하게 지내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아주 부드럽고 평화로운 한 마디를 던진다. 그것이 천지를 진동하는 우렁찬 학의 울음소리로 들리는 것은 그분의 고고한 삶과 깊은 통찰에 우리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않는 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들리더라도 소음일 뿐이다. 그렇다. 태양은 스스로 빛날 뿐 생색을 내지 않는다. 학은 그늘에서 숨어 울지만 천지를 진동시킨다.

주변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미미하고 서툰 재주로 서툴게 세상을 기웃거리면 일찍 사라지고 만다. 꾸준히 성심으로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각하고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어느 때가 되어 그릇이 차서 넘친다. 중부괘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겸손으로 때를 기다리면,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 그 위로 바람이 불어 물결을 일으킨다. 저수량이 많을수록 물결이 더 크게 일어난다. 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더듬다가 느낀 생각이다.

“鳴鶴이 在陰하니 其子和之로다. 我有好爵이니 吾與爾靡之로세! 象曰 其子和之는 中心願也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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