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두부는 아주 부드러워서 씹지 않아도 삼킬 수 있다. 그래서 노인을 공양하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이빨이 없는 귀신을 공양하기 좋은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중요한 제수 음식이기도 하다.

상기 기사에서 절들마다 각 왕능에다 두부를 공급한다는 언급도 있었거니와, 귀천에 관계없이 조상께 바치는 음식이었다. 실록에 두부와 관련해 나와 있는 기사들을 보자.

문종 6권 1년(1451 신미, 명 경태(景泰) 2년) 2월 22일(신묘) 5번 째 기사 대호군(大護軍) 정효강(鄭孝康)이 상언(上言)하기를 “염전(鹽田)은 소로 갈아서 똥과 오줌을 섞어 소금을 굽기 때문에 반드시 정결하지 못할 것인데, 제향(祭享) 및 공상(供上)하는 두부(豆腐)에 이러한 물을 쓰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산수(酸水)를 쓰게 하소서”했다.

임금이 여러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두부를 만드는 데 무슨 물을 쓰느냐? 어떤 이는 소금의 융액(融液)1763) 을 쓴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바닷물을 쓴다고 하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하니, 이계전(李季甸) 등이 대답하기를 “소금의 융액을 씁니다. 시속에서 간수(艮水)라고 합니다”고 했다.

임금이 “간수(艮水)는 깨끗하지 못하니 두부(豆腐)를 만드는 데 쓸 수 없다”했는데, 정효강(鄭孝康)은 재주와 행실이 없고 불도(佛道)만 좋아하면서 진급(進級)할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정효강이라는 사람이 흔히 시중에서 만들어지는 두부는 간수가 더러우니 조상을 모실 음식(제향) 및 왕실에서 먹을 음식(공상)으로 적당하지 않고, 그러니 식초를 섞은 물을 사용하도록 간언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간수는 알카리성이므로, 정효강이라는 사람이 간신이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왕실에서도 조상을 모실 때 두부를 썼으며, 또 두부를 만드는 방법을 임금과 신하가 대화할만큼 두부가 흔한 음식이었다.

성종 5권 1년(1470 경인, 명 성화(成化) 6년) 5월 26일(계묘) 7번 째 기사 전라도 관찰사에게 민간에 떠도는 요사한 말의 근원을 캐어 의혹을 풀게 하라고 명하다.

“윤필상(尹弼商)의 반인(伴人) 임효생(林孝生)이 고하기를 함평(咸平) 사람 김내은만(金內隱萬)의 아내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입이 셋 머리가 하나인 귀신이 하늘로부터 능성(綾城) 부잣집에 내려와서 한 번에 밥 한 동이(盆) 두부국(豆腐羹) 반 동이를 먹었는데, 그 귀신의 말이, 이달에는 비가 안오고 다음달 스무날에는 반드시 비가 내릴 것인데, 만약 이날 비가 안 오거든 밭을 매지 말아라 하고 조상 귀신도 아니고, 입이 셋에 머리가 하나인 귀신이 밥 한 동이와 두부국 반 동이를 먹는다고 한다. 귀신이 먹는 음식이 하필이면 두부국이라고 한다.”

한편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군들이 조선에 왔을 때, 원래 군량은 조선에서 대기로 했다.

하지만 전쟁 초년의 그 어지러움 속에서 백성들은 제대로 밥을 대지 못했고, 그래서 원군들은 시골마을이며 관아 등을 어지간히 털어먹은 모양이다.

결국 명나라 군사들에 대한 식량 지급의 기준을 마련했으니 선조실록 26년(1593)에 나온 기사에는 중군(中軍)·천총(千總)·파총(把總)에게는 천자호반(天字號飯)을 지급한다.

고기 한 접시, 두부·소채·절인 생선 각 한 접시, 밥 한 주발, 술 세 잔. 그러니까 장교들 각 아문(衙門)의 차인(差人)에게는 지자호반(地字號飯)을 지급하고, 고기·두부·소채 각 한 접시, 밥 한 주발. 연락관들 군병(軍兵)에게는 인자호반(人字號飯)을 지급하고, 두부·절인 새우 각 한 접시, 밥 한 주발. 일반 병사. 절인 새우라 함은 아마 새우젓일 듯? 이렇게 지급한다고 나온다.

신기하게도 장교부터 사병까지 밥과 두부는 모두 공통 메뉴다. 명나라 병사들의 입맛에 맞으면서 한국인들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찾다보니 그 협의점이 두부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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