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춘추시대 동방의 강국 제와의 장작(長勺)전투에서 활약한 노의 조귀(曹劌)는 평민이었다. 강국으로 부상하려던 제는 이 전투에서 패하여 기가 꺾였으며, 쇠약해가던 노는 망국의 시기를 뒤로 늦출 수 있었다. BC 685년, 제의 군주로 즉위한 환공은 노가 라이벌 규(糾)를 지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장공도 친히 대군을 이끌고 국경까지 진출했지만, 대패하고 간신히 도망쳤다. 전후에 장공은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군사력을 증강하고 각종 병기를 갖추어 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때 조귀가 등장하여 제와의 필승책을 제시했다. 처음 그가 장공을 만나려고 하자, 친구가 그런 말은 높은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니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조귀는 높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원대한 생각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귀가 어떻게 싸울 것이냐고 묻자 장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골고루 나누어 주겠네.”

“작은 은혜에 불과하여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따르겠습니까?”

“제사를 올릴 때 검소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작은 믿음에 불과하므로 신(神)이 복을 내리겠습니까?”

“소송을 공정하게 하면 어떤가?”

“충실한 방법입니다. 저도 따라 싸우겠습니다.”

장공은 조귀와 함께 수레를 타고 출전했다. BC 684년, 제군이 국경을 침범하자 장공은 곡부시의 북쪽 교외인 장작까지 적을 유인했다. 오판한 제군은 엄청난 기세로 노군을 추격했다. 노군은 제군의 2차례 공격을 막아냈다. 두 차례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적진으로 진입하지 못한 제군은 사기를 잃고 잠시 퇴각했다. 노군이 추격을 하지 않자 제군은 노군이 겁을 먹고 응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 번 공격했다. 찬스라고 판단한 조귀는 반격하자고 건의했다. 장공은 직접 북을 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제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무너졌다. 장공이 추격하려고 하자 조귀는 매복의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장공은 추격을 중지했다. 조귀는 직접 제군의 동향을 확인한 후 추격해도 좋다고 건의했다. 장공은 제군을 추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장작 전투는 제후국끼리의 전쟁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략과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고대의 군사적 사상이 체현된 전쟁이라는 의의가 있다. 제와 노 사이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전쟁은 정의와 불의가 싸우면 병력과 무기의 우수성보다는 정의의 군대가 최후의 승리를 얻는다는 일종의 원칙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첫 번째 전쟁에서는 노의 장공이 제를 침공했지만, 신하를 희생양으로 삼아 간신히 탈출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나라의 자존심과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제는 승세를 몰아 노를 침공했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장공은 1차전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철저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또한 전례를 무시하고 평민 조귀를 과감하게 등용하여 그가 필승의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장공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조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반공과 추격을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후대의 모택동(毛澤東)까지도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에 관한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장작전투에서 노가 적이 피로했을 때가 아군이 공격할 기회라는 작전원칙을 잘 지켜서 제군을 격파함으로써 중국의 전쟁사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긴 좋은 사례라고 높이 평가했다. 조귀가 주장한 전쟁의 원칙과 장작전투의 사례는 후대 중국의 ‘후발제인(後發制人)’이라는 방어 전략의 모델이 되었다. 북의 잦은 도발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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