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에 보면 세종 10년(1428년) 공조 판서 성달생(成達生)이 명나라에 있으면서 보고하기를 “사신 백언(白彦)이 찬녀(饌女)를 시켜 술·과일·두부(豆腐)를 만들어 올리니, 황제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겨 곧 백언을 어용감 소감(御用監小監)으로 제수(除授)하고 관대(冠帶)를 내려 주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명나라의 사신 백언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나라로 돌아갔는데, 그 때 딸려간 찬녀가 정통 조선식 두부를 만들어서 황제에게 올렸더니, 황제가 두부가 맛있다면서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 명나라 황제가 세종대왕에게 칙서를 보냈다. 임금이 의장을 갖춰 꿇어앉아 황제의 용언을 듣잡노니 세종 16년(1434년) 천추사(千秋使) 박신생(朴信生)이 칙서 세 통을 싸서 받들고 경사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의장(儀仗)을 갖춰 세자 이하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서를 맞기를 의식과 같이 했다.

그 첫째에 말하기를 “지금 목란하(木蘭河) 등 위(衛)의 야인 지휘(指揮) 올고리(兀苦里) 등이 아뢰기를, ‘근자에 라리(剌里) 지역에 가서 흑룡강의 칠성(七姓) 야인들이 송화강을 건너서 조선국에 가서 침노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이 도적들이 간사하고 속이니 허위인지 사실인지의 여하는 알지 못하나, 이에 왕이 보내 온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특별히 왕에게 일러 알게 하는 것이니, 왕은 변방을 지키는 관원에게 경계하여 밤낮으로 마음을 써서 방비하여, 소홀한 근심이 없게 하여 짐의 뜻에 부합하게 하라”하였고, 그 둘째에 말하기를 “왕이 먼젓번에 보내 온 반찬과 음식을 만드는 부녀자들이 모두 음식을 조화(調和)하는 것이 정하고 아름답고, 제조하는 것이 빠르고 민첩하고, 두부(頭腐)를 만드는 것이 더욱 정묘하다. 다음번에 보내 온 사람은 잘하기는 하나 전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이 다시 공교하고 영리한 여자 10여 인을 뽑아서, 반찬·음식·두부 등류를 만드는 것을 익히게 해 모두 다 정하고 숙달하기를 전번에 보낸 사람들과 같게 하였다가, 뒤에 중관을 보내어 국중에 이르거든 경사(京師)로 딸려 보내도록 하라”하였고, 그 셋째에 말하기를 “중국의 땅이 심히 더워서 비록 해청(海靑)이 있으나 기르기가 어려우니, 왕의 나라에서 해청을 잡을 수가 있거든 적당한 사람을 시켜 가져와서 짐(朕)의 한가한 시간에 날려 보는 소용에 이바지하게 하라. 그리고, 오는 사람을 시켜 중로에서 잘 살도록 보살펴 길러서 소루하고 실수함이 없게 하라”하였다.

두부를 만든 이야기 중 실록(승정원일기)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이정귀가 아뢰기를 “천사를 따라오는 두목(頭目)의 인원을 400명으로 마련하였는데,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왔을 때에는 360여 명이었습니다. 자고로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으니, 이번 두목의 인원을 고천준과 최정건 때와 같이 한다 하더라도 다행스러워할 것입니다. 전부터 천사가 올 때 쓰는 두부(豆腐)는 모두 여염(閭閻)의 여인들로 하여금 만들게 하였는데, 그들이 고생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이 있는 곳에 여인들이 드나들면서 진배(進排)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경산(京山)의 승려들을 감사가 적절히 정해 보내되 양식을 지급하면서 일을 시킨다면 고생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조 3년 1625)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할 두부를 여염집 여인을 차출해서 만들다가, 승려들에게로 넘기도록 하는 상소다. 이 말을 들은 인조는 그대로 하라고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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