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33. 신약에 약속한 목자는 누구이며, 약속한 성전은 어디이며, 주 강림한 곳은 어디라고 하셨는가? 성도가 그곳에 가는 것이 이단인가, 정통인가?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목자나 성전이나 강림은 신약에서 신약의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신약으로 찾아들어가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구약에서의 목자는 ‘다윗 언약’에 준해서 나타나는 메시아를 말한다. 에스겔 34장 전장을 통해서 보면, 먼저는 가짜 목자를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오실 다윗’을 소개하게 있으면서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4:15)’

여기서 다윗과 ‘다윗 언약’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다윗이 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정작 이 땅에 오신 메시아는 다윗이 아니라 ‘다윗 언약’의 완성자로서 오신 ‘다윗의 자손’이다(롬 1:3). 다윗과 다윗 언약의 차이성이 중요한 이유는, 다윗이란 일개 개인은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존의 공간과 시간관에 저촉 받는 양태로 이 지상에서 사셨던 분이지만, 다윗 언약에 따라 오신 메시아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으신 분으로 오신 것이다.

이는 곧 ‘성전이 어디 이며 강림한 곳은 어디 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동시에 얻을 수가 있다. ‘다윗 언약’은 ‘다윗’이라는 실존 인물을 과거 역사적 근거로 해서 출발하기에 구약이나 신약에 나오는 언어 표현들이 기존의 시간과 공간성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한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의견에 그대로 동조하는 해석만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성전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성전은 누구를 말합니까?’ 성전을 이루는 구성요건은 기존의 공간이나 시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만 받았느냐’로 판정난다. 성전은 곧 ‘기도하는 집’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으로 바뀌게 하셨다(요 2:26). 어디서 기도해야 응답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잘못된 질문을 하는데 이 잘못된 질문은 성경 말씀을 대하는 모든 인간들이 나타낼 수밖에 없는 오해의 사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여기서 예수님께서 ‘때’를 언급하셨다. 이 ‘때’는 인간들 쪽에서 다가서는 만들어 낼 수 있는 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과정 속에서 비칠 그 때다. 곧 ‘사건’이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범주는 신약에 와서는 탈락되고 ‘복음적 사건’ 속에서 비로소 성도는 하나님과 교류가 된다. ‘복음적 사건’이란 기존의 그 어떤 장소나 그 어떤 사간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고 성공리에 떨어져 나가서 형성된 ‘말씀 완성 상황’을 두고 말한다. 따라서 이때를 만드시고 그 때 안에서 자기 백성만을 건져내시는 상황이 이 지상에 유발하는 권한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 고유 권한에 속하는 문제다.

마치 다윗이 메시아는 아니지만 다윗에게 ‘다윗 언약’에 의해서 이끌려서 그가 구원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는 결코 자기 쪽에서 구원의 줄을 엮어갈 수는 없지만 ‘새 언약’의 능력에 의해서 잠식 될 때, 그 성도의 존재는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성전이 형성되는 바로 그 ‘때’임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그가 메시아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여기냐 저기냐가 중요하지 않고 서기 몇 년도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직도 날짜 계산이나 장소 계산하는 이들은 그 자체가 새 언약의 능력 밖에서 종교 개임을 하는 중이다고 보면 된다. 아직까지 다윗 같은 특정 인물을 찾고 있다면 그들에게는 악마의 종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윗 언약에 의한 분을 찾는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메시아를 고대한 자기 자신들의 종교적 기대성에 의해서 무참하게 살해당하신 바로 그 분이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안식일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가져온 재물로 하나님의 성막과 그 기물과 법궤를 만들어 섬기게 된 것이다(출 35~39장). 그리고 모세는 백성들을 축복하였다(출 39:43). 신약적인 성전은 ‘이 육체의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다시 건축하겠다’는 것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이것을 세우리라(요 2:19, kjv)’

다시 말하면 율법에 의한 구약적인 성전을 헐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의 재물로 지은 것이다. 예수님은 얼마 후에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죽을 것을 예고했으며, 성경에 의하여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을 말한 것이다. 신약적 교회당은 십자가 사건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였다. 이것이 이방인의 교회 안디옥 교회였다. 장소적 개념은 성전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에도 광야의 교회가 있었다(행 7:37~38). 바울은 이렇게 성전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주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성전이 모여 교회가 되는 것이다. 나 혼자 ‘성전이다’라고 하며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죄 사함 받은 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모인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이 안에 계신 예수님을 교회 혹은 교회의 몸이라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나 교회는 곧 하나님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교회(성전)는 곧 예수님이며 예수님은 곧 교회(성전)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교회) 안이나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나 성전이 될 수 없으며 손으로 지은 건물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신약의 목자장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열 두 명의 제자들이며 그 중 바울도 목자이다. 하나님은 각 지역별로 한 장소를 정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계시록에 대표적으로 7교회가 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은 리더를 세우셨다. 리더인 목자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며 레위지파도 아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레위지파가 아님에도 목자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약속한 목자에게 계시록을 열어 주었다는 말도 있지만, 계시록만 열어 주었다고 약속한 목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유전과 전통으로 양들을 털을 깎아 먹고 사는 목자는 약속한 목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신만이 세상에 유일한 참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낭설 하는 자도 약속의 목자가 될 수 없다. 엘리야도 자신만이 목자인줄 알았지만 7000명이 있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참 목자는 하나님의 뜻에 다윗과 같이 연합한 자이다.

주님의 강림은 이미 우리의 성전인 마음 안에 계신다. 성령은 진리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아직도 자신의 마음 밖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성전도 아니며 구원자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모두가 목자이며, 구원자이고 증거자들이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 또는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은 아직 진리가 자신 안에 없다는 증거다. 믿음의 결과는 영생이다. 영생은 예수이며 참 하나님이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매번 질문이 그러하지만 본 질의 역시 성경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질문이다. 신약에 약속한 목자나 약속한 성전이 있다는 것도 그러하고, 주님께서 어떤 성전을 지목하여 오직 그곳에만 강림하실 것이란 교훈을 주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장 16절에서 신약의 성도들에게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씀한 것이 있지만 이는 주님 자신을 지칭한 표현이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어떤 한 사람, 한 지도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신약시대는 오직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신 구약과 같이 구원 역사를 펼쳐 가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규정한 신약 교회의 구성 요소는 크게 둘로 교훈되고 있다. 내적 구성 요소와 외적 구성요소다. 내적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요 4:23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원어가 가리키는 의미에서 보면 여기서의 ‘신령’이란 성도의 중심을 가리킨 표현이고, ‘진정’이란 ‘하나님의 말씀’ 곧 올바르게 깨달은 진리를 가리킨다. 즉 진실로 바른 진리가 선포되고, 그 선포되는 말씀에 중심으로 화답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것으로서, 바로 이것이 신약교회가 되는 절대적 내적 구성요소인 것이다.

외적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마 18:20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요 4:23과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요약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면 비록 그 교회 공동체가 두 세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과 함께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어떤 ‘한 목자’, ‘한 성전’만을 지목하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는 계시록 1장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형상에서도 잘 나타내준다. 계 1:12절 이하에는 요한이 주님의 형상을 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상을 1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여기서 일곱 별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는 소아시아에 세워진 일곱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에서 7이란 숫자가 ‘완전’과 ‘충만’을 뜻한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는 온 세상에 세워질 주님의 교회를 가리킨 표현으로 해석됨이 합당하다. 따라서 신약의 구속사는 어떤 한 목자나 한 교회를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 질의와 같이 신약에 약속한 목자가 있고, 약속한 성전이 있으며, 그 교회에만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처럼 인식하여 ‘성도가 그곳에 가는 것이 이단인가, 정통인가?’ 라고 묻는 것은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감히 인식할 수 없고 또 질문할 수 없는 말이다. 그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크게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SOSTV 생애의 빛]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약속한 목자가 한국 사람일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성전이 한국의 한 도시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 믿는 사람 본인이 이 사실을 믿을 당시 감정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련에 처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며 그 결과로 분별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이성을 뒤로 감추고 감정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거기다가 정교하게 모방된 진리를 제시하면 쉽게 한국의 어느 한 사람을 약속의 목자로 믿게 되고 또한 한국의 어느 한 도시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착각하게 된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묵시를 열어서 펼쳐 보일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성경을 통하여 그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다니엘서를 살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데, 다니엘서 9장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면서 이상을 풀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단 9:21, 22, 23)’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다니엘에게 보내어 이상을 풀 수 있도록 해주시고 있을까? 그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고 높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다니엘서 9장의 앞부분에서 다니엘의 기도내용을 통해 그 증거를 살펴보자.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여 반역하며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단 9:4, 5, 15)’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며 높이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떠났음을 슬퍼하며 참회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인자를 베푸시고 또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이상을 풀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사랑하여 지키는 자들에게 이상을 풀어 보이신다는 명확한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증거로 요한계시록은 묵시를 풀 수 있는 ‘예수의 증거(대언의 영)’을 가진 자들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 19:10)’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고 높이며 사랑하여 지키는 자들에게 대언의 영을 주셔서 묵시를 열어 보이신다. 묵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펼쳐지는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정교하게 모방하여 한국의 어느 한 사람이 ‘약속의 목자이다’ 어느 한 도시가 ‘예루살렘 성전이다’라고 속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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