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설마 설마 했지만 근육질의 마초(Macho), 푸틴은 드디어 군침 돌게 만들던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꿀꺽 삼켰다. 크림반도는 거대한 내해(內海)인 흑해의 지정학적 또는 전략적 요충이다. 크림반도를 지배하는 국가가 흑해의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자원은 물론 제해권(制海權)을 쥐는 데 있어 우위를 점하게 된다. 더욱이 크림반도를 지배하는 국가가 강대국인 러시아인 한, 그 요충을 지배함으로써 러시아는 서방의 팽창을 저지하고 중앙아시아, 중동, 지중해 연안으로 국력과 군사력을 효과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의 세바스토폴 항은 러시아에는 드문 부동항(不凍港)으로서 러시아의 전통적인 군항이다.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의미심장한 의미와 유용성을 지닌다. 이 소중한 항구를 러시아 입장에서는 결코 놓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지난 1991년 고르바초프 시절, 우크라이나가 소연방에서 떨어져 나간 뒤에도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을 임차해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보아 크림반도를 서방이 지배한다면 러시아는 그야말로 아랫배가 꽉 조여 오는 듯한 안보적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크림반도와 그 흑해 연안의 경제적 자원도 다 빼앗길 것은 더 말할 것 없다. 따라서 푸틴에 의해 그 같은 요충을 빼앗긴 서방으로서는 손실이 너무나 크다.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내줌으로써 서방은 소연방 해체 이후 조심스럽게 진행해온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 전략에 제동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아랫배를 꼼짝 못하게 움켜쥘 수 있는 급소(急所)를 놓쳤다. 반대로 러시아는 서방의 동진을 막을 급소를 손에 넣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일제히 푸틴의 크림반도 접수에 격렬히 항의하고 나선 것은 바로 크림반도의 그 같은 중요성 때문이다. 미국은 흑해에 구축함을 보내고 우크라이나 인접국인 폴란드에 공군기를 증파하는 등의 엄포성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력을 동원한 행동파 마초 푸틴을 말릴 수는 없었다. 푸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국이나 서방이 그렇게 나와 봤자 다소 귀찮고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무력으로 러시아를 저지할 형편에 있거나 그럴 만한 결속과 뱃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푸틴은 파수견이 시끄럽게 짖어대고 그 바람에 주인이 깨어 눈을 번히 뜨고 있는 상황인데도 어느 집을 강도가 털어 가듯이 크림반도의 통치 기관들과 내통하며 그 땅덩어리는 물론 심장까지 고스란히 털어갔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와 합병을 환영하는 러시아계 주민이 58%가 넘는 우크라이나의 자치 공화국이다. 그곳의 총리도 의회도 주민도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서 움직인다. 그런 곳에서 실시한 러시아와의 합병에 관해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라는 것은 결과가 말해주었듯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그처럼 하나마나한 주민 투표였지만 그것이 러시아에는 형식적 명분을 준 것은 사실이어서 아닌 게 아니라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접수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렁이는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삼켰던 먹이를 다시 토해낸다. 그렇지만 푸틴은 아무리 오바마와 서방이 떠들어대어도 한 번 입에 삼킨 크림반도를 다시 토해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바스토폴 항이 크림반도에 있는 한 더더욱 그러하다.

강도가 떠난 뒤에도 파수견은 시끄럽고 주인은 외양간을 고치느라 바쁘다. 서방은 러시아에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으르릉거리지만 그것은 기껏 경제 제재 정도다. 핵을 포기하고서 보잘 것 없는 군사력을 가진 우크라이나는 이제서야 군사 대비 태세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더욱이 경제 제재라는 것도 크림반도의 원상회복을 가져올 만큼 러시아에 참아내지 못할 커다란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유럽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아 서방의 경제 제재에 러시아가 역(逆) 제재로 맞설 경우 서방의 고통도 적지 않아 쌍방의 고통을 부른다. 미국이 미국 내에 있는 러시아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과 서방 기업들이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고 기(旣)투자 기업은 철수하는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거 역시 러시아에만 일방적으로 고통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러시아와 같은 자원부국이며 강대국을 경제 제재만으로 옭아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과거의 경험으로 보아 서방의 경제 제재라는 것은 상대가 굴복할 때까지 강한 지속성을 보인 일이 드문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관계가 교차해 그 결속력이 흐트러지기 예사였다. 이 정도를 푸틴이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오산이다. 그는 미국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핵무장 강대국 간의 정치 군사적 게임의 시작과 과정, 결말, 그 전개의 범위와 한계에 이르기까지 아주 능숙한 국제 정치 군사적 게임의 달인일 것은 더 강조할 것이 없다.

지구 최후의 날이 될 핵에 의한 확증파괴력(Mutual Assured Destruction/MAD)을 갖춘 미국과 러시아 핵 강국 사이의 충돌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이 크림반도의 접수에 나선 러시아의 행동에 즉각 군사력을 투입하기도 조심스러웠지만 러시아 역시 군사력에 의존은 하면서도 서방에 대한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은 보인다. 그렇더라도 미국과 서방이 푸틴에 얕잡혀 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로 보아 크림반도 갈등의 결말은 푸틴 완승, 오바마 완패, 러시아 완승, 서방 완패다. 이 같은 결말이 빚어낼 미국과 러시아의 위상 변화와 전 세계에 미칠 여파는 간단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비핵화의 압박을 받는 북한의 행동에 미칠 영향 등을 포함해 우리와도 결코 무관할 수가 없다.

크림반도 사태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는 것은 힘이 없는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끼리의 싸움이나 또는 강대국이 이끄는 진영 싸움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평화는 공짜로 또는 말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동맹이나 동맹 핵강대국의 핵우산이 안보의 최후 보루가 될 수도 없다. 안보 역량을 기르고 국력을 기르는 것이 궁극적인 최선이다. 우크라이나가 우리처럼 분단국가가 되고 만 것은 동병상련의 느낌을 갖게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강대국들의 견인력에 따라 국민들이 분열됨으로써 두 쪽으로 갈라졌다. 따라서 ‘흩어지거나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은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 데 있어 변함없는 금과옥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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