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타족 출신 유지원(劉知遠)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병약하고 소심한 소년이었지만, 훗날 후진을 세운 석경당(石敬瑭)의 군문에서 신임을 얻어 출세했다. 후당의 제위를 찬탈한 이종가(李從珂)가 진양(晋陽)에 웅거하던 석경당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석경당은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일대 16개 주를 할양하고, 거란 태종을 아버지로 섬기는 조건으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유지원은 “칭신은 몰라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은 지나칩니다. 재물을 주고 병력을 빌리는 것은 좋지만,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중국의 우환이 되면 후회해도 늦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석경당은 그의 입을 막았지만, 후세의 중국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태종은 석경당을 황제로 세웠다. 역사는 그를 후진의 고조(高祖)라고 불렀지만, 당시의 호칭은 ‘아황제(兒皇帝)’ 즉 거란 태종의 아들인 황제였다. 유지원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한 태종은 석경당에게 그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석경당이 죽자, 조카 석중귀(石重貴)가 뒤를 이었다. 흔구(忻口)에서 거란을 대파한 유지원은 하동을 차지하고 왕업을 세울 생각을 품었다. 그의 정치적 계산은 치밀했다. 우선 최대의 강적 거란과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거란은 중원을 약탈하는 악의 축이고, 자신은 중국인 안전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했다. 삶의 터전을 잃지 않으려는 중국인들의 집념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기 위한 유지원의 생각은 주효했다. 건국 이후에 국호를 한(漢)으로 정한 배경에는 이러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석중귀가 요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동안 유지원은 진양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강군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의 병력은 어느새 5만 명으로 늘었다. 후진이 거란의 태종에게 망하자, 중원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부장들이 군사를 일으키자고 건의했지만 유지원은 서둘지 않았다. 거란의 강력한 기세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었다. 거란은 어차피 중원을 직접 지배하는 것보다 재물과 필요한 물자를 얻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면 거란이 물러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천하를 차지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과연 과거 후진의 장수들이 거란의 관리들을 죽이고 후한으로 귀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놀란 태종은 날씨가 너무 덥고 풍토가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후진의 관리와 궁인들은 물론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북쪽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었다. 유지원의 계산은 정확했다. 좌절감에 빠진 중원의 각 세력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947년, 유지원은 태원에서 한을 세웠다. 곽위를 비롯한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유지원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경들이 공이 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부고(府庫)가 비어서 줄 것이 없다. 사민들에게 재물을 바치게 하여 그것으로 보답할 것이다.”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던 유지원의 아내 이씨는 매우 총명했다. 그녀는 유지원이 목동이었을 때 만나서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밤중에 도망쳐서 아들 유승우(劉承佑)를 낳고 평생의 반려자로 살았다. 남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이렇게 간했다.

“폐하께서는 하동에 의지하여 대업을 여셨습니다. 의병(義兵)이라 큰소리를 친 후에 백성들에게 은혜는 베풀지 않고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새로운 천자가 백성들을 구하려고 하지 않으니 저라도 후궁에서 가진 것을 모두 들고 바깥으로 나가겠습니다.”

유지원은 부인의 간언을 받아들여 즉시 민심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안정되자 그는 948년에 대량을 도읍으로 정하고 연호를 건우(乾祐) 원년으로 고쳤다. 이어서 자신은 동한명제 유장(劉庄)의 8번째 아들 회양왕 유병(劉昞)의 후손이라 하여 사당을 세우고 선조인 유방(劉邦)과 유수(劉秀)에서 유전(劉琠)까지의 위패를 봉안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가장 믿었던 태자 유승훈(劉承訓)의 죽음과 황제로 등극하고 1년도 되지 않아 찾아온 자신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3년 후인 948년에 곽위가 나라를 찬탈했다. 세상의 바닥에서 하늘까지 올라갔던 한 사나이의 일장춘몽은 개인의 능력보다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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