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춘추시대 제나라 경공 때의 일이다. 서쪽의 위나라와 북쪽의 연나라가 연이어 침입하자 제 경공은 전략가로 추천받은 사마양저를 장군에, 장가라는 대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둘은 다음날 정오에 사령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양저가 사령부에 도착해 군대를 사열하며 기다렸지만 장가가 술에 취해 나오지 않았다. 장가는 경공의 총애를 믿고 아침부터 환송연에 참석해 음주가무에 탐닉하다 해질 무렵 나타났다. 양저가 총사령관에게 여쭈었다. “국가와 백성의 목숨이 총사령관의 한마디에 달려 있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 환송연이 다 무엇이옵니까?” 이어 군법무관을 불러 물었다. “군대에서 약속을 어기면 군법에 어떻게 처리하게 되어 있는가?” 군법무관이 대답했다. “목을 칩니다.”

이 말에 장가는 겁이 덜컥 났다. 호위 무사를 왕궁에 급파해 경공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양저는 망설임 없이 장가의 목을 쳤고, 전군을 소집해 잘린 장가의 목을 두루 보게 했다. 이에 놀라 전군이 바들바들 떨었다. 이윽고 경공이 급파한 특사가 말을 몰고 질주해 양저 앞에 도착했다. 장가를 특별 사면하라는 어명을 전한 특사에게 장군이 이미 왕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통솔하고 있을 땐 임금의 명령이라고 해도 복종하지 않을 때가 있소라고 하며 경공에게 돌려보냈다. 이후 주변 제후들은 제나라에 굴복했다. 제나라는 양저의 추상같은 군 통솔 방식에 의해 군기가 엄정했고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얘기다.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한 한나라 주아부 장군 일화도 있다. 황제인 한문제가 주둔지 장병을 위로하려고 직접 행차에 나섰는데 입구를 지키던 군관이 출입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호위대장이 다그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군께서 명하시되, 군에서는 장군의 명을 따르지 황제의 명을 받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일화는 당시에도 절대군주가 간섭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준다. 이미 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rule of law)’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대라는 시스템이 오로지 군법에 의해 운영돼 움직이며 군주라도 군법 위의 존재로 군림할 수 없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조선왕조 오백 년도, 위대한 신라 천년 왕국도 군주의 전횡을 막는 장치가 있었다. 정도전, 하륜 등이 법령을 정비하고 민본정치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장일치제인 화백제도가 있어 의사결정이 군주 한 사람의 독단을 막았기 때문이다. 임금 앞에서도 소매를 걷어붙인 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간하던 사대부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상소를 올리던 유생들의 충정이 나라의 기틀을 유지하게 한 것 아니었는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관련한 조사를 벌이던 검찰이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은 10일 오후. 대통령의 유감표명이 있었던 것이 바로 이날 오전이었다. 검찰은 왜 양저처럼 미리 장가의 목을 치지 않고 본격수사 착수를 미룬 채 을 기다렸는가.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데도 좌고우면한 것은 아니었는가. 지난해 비리 정치인에 대한 검찰의 사정수사가 검토되고 있다는 소문이 여의도에 나돌았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정치인 수사나 소환 소식이 없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부러 사법처리를 않도록 조정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전혀 믿고 싶지 않은 추측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아 주목되는 통일위원회. 이 위원회가 중장기적으로는 남북연합이나 연방제, 나아가 남북통일까지 지향하고, 단기적으로는 남북 간 이질감 해소, 화해 협력, 5·24조치 해제 등을 검토해 경색된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는 의미 있다. 그러나 기존 조직 통일부는 무엇인가. 기우(杞憂)일까. 춘추전국시대의 엄정한 군법처럼 제대로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정부라면 옥상옥같은 새로운 위원회가 필요 없을 텐데. 기초연금 후퇴 논란과 관련해 지난해 불거진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 파동에 정부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지 의심한 국민이 많았다. 새누리당은 최근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는 취약지역이라는 이유로 제주 경선에 100% 여론조사를 반영키로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어떻게 할 것인지 유권자들은 어리둥절하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당원을 동원한 순회경선으로 할 것이냐 아니냐도 마찬가지다. 규제개혁 문제와 관련한 책상머리 행정은 장관들이 각자 위임 받은 권한을 망각하고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 아닌가.

정치란 생물이라고 했던가. 그때 그때 변화된 상황을 기민하고 유연하게 반영하는 것이 정치이겠지만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있어야 국민들이 편안하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 편으로 조사되고 있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액튼 경의 말처럼 장관들이 눈치만 살피고 대통령 한 사람에게 너무 큰 권한이 집중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지금도 개헌 논의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일 터. 개인기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유지되는 국정운영이 보다 덜 위험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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