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지난해 말 우리나라는 ‘무역 강국의 새 역사’를 썼다. 순풍에 돛단 듯 무역수지 호조의 여파가 올 1월까지 이어져 24개월 연속으로 흑자 행진을 하는 등 올해에도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다. 그 같은 무역수지 호황 속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공격 투자 없이 웅크리고 있는 속사정에는 수출로 벌어들인 이익보다는 수입 규모 축소로 인해 대량 지출하지 않아 발생한 수지라는 인식이 강하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로 아직 안심하기가 이르다는 자체 판단이 나온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한 번의 무역 흑자 신기원을 향해 우리 경제가 힘찬 행보를 시작하는 이때에 기업들이 나서서 투자 활성화로 내수시장에 숨통을 틔어줬으면 하는 기대다. 그렇게 하려면 기업들이 국내외 경쟁력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 선결과제인데, 정부가 나서서 기업 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를 없애야 한다. 아직 우리 경제계에서는 기업활동의 발목을 잡는 한국형 규제들이 많아 경제성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정부에서는 규제 혁파를 주장하지만 철폐, 완화보다는 새로운 규제가 더 많이 신설되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대한민국은 규제왕국이 돼가고 있는 현실이다. 19대국회에 들어 경제관련 위원회에서 입법 발의한 건수를 보면 규제 1건을 폐지, 완화할 때에 새로운 규제는 5.3건 꼴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입법할 때마다 규제 건수가 늘어남은 당연하다. 그런 입장이다 보니 기업과 경제계에서 ‘한국은 규제 때문에 투자하기가 힘들다’는 말은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비단 산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각종 규제가 우후죽순처럼 널리 퍼진 것은 입법과정에서 규제를 거르지 않고 생산해낸 탓이 크다. 그래서 정부입법의 경우에는 국민 편익을 고려하고 기업 활동의 신장을 위해 규제 심사가 강화되는 편이지만 의원입법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국회의 입법 로비과정에서 생겨나는 근시안적인 판단에 의해서나 또는 이익단체가 조그만 이익이라도 얻어 보자는 섣부른 판단에서 기인하는 바가 큰데, ‘되로 얻고 말로 주는’ 격이다.

개인이나 단체 또는 기업의 활동에 제한을 주는 규제는 통상적으로 법령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 등 행위 주체가 당연히 누려야 함에도 못 누리게 제재하거나, 하지 않아도 될 행위를 하게끔 강제하는 요식들이 공공의 행정행위(行政行爲)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 등 주체가 사회·경제활동을 하면서 규정된 제도에 의해 이익이 보장되기도 하고 손해가 발생되기도 한다. 그렇듯 공공생활에서 규제는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하거나 손해되는 것도 상당하다고 하겠다.

제도가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국민생활과 기업활동에 큰 불편을 주고 나아가 국민을 잠재적 범법자로 내몰기도 하는데 이는 응당 없어져야 할 규제의 일종이다. 정부는 1989년 1월 1일 국민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면서 1996년 해외여행 후 입국할 때 적용받는 내국인 면세 한도를 400달러로 결정된 이후 18년째 그대로다. 이 금액은 일본(2405달러), 미국(800달러)이나 중국(750달러)보다도 적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액의 절반정도 수준이니 세계화나 국제경쟁을 하면서도 쇄국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증여세 공제 한도액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1993년 말 세법 개정 때 1500만 원에서 3000만 원으로 인상된 이후 20년째 그대로다. 그동안 소비자물가지수는 2배로 뛰었고, 서울지역의 아파트 전세가격 지수를 보아도 거의 3배로 뛰었음에도 정부는 아랑곳없다. 이렇게 정부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다보니 자녀를 결혼시킬 때 행여 전세금 보태주는 부모들에게 잠재적 범죄로 내몰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낡은 제도는 규제가 되어 국민 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가운데 기업의 투자나 활발한 활동을 옥죄는 규제는 더욱 많다. 정부가 새롭게 출범할 때마다 “과감하게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규제는 계속 늘어났던 것이다. 참여정부 때인 2007년 말 5114건이던 등록 규제 건수가 이명박정부 5년간 1만 4889건으로 대폭 늘어났고, 박근혜정부에서도 개선되지 않아 지난해 말 현재 규제건수가 1만 5269건에 달하고 있다.

박근혜정부 출범 후 1년 동안 줄기차게 규제 개혁을 내세웠지만 공무원들의 겉핥기식 시늉과 국회의원들의 규제 감소 노력 없는 입법활동으로 인해 성과가 별로 없었고, 그 여파는 국민생활이 불편하고 기업활동에 장애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지난 10일 규제개혁에 대해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가 쳐부술 원수,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는다는 암덩어리”라 언급하며 강도 높은 규제 혁파를 주문했다. 하지만 워낙 눈치 보기에 익숙한 공직자들이라 역대정부가 그러했듯 시간만 지나면 후지부지 끝나는 과거 경험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분명한 점은 ‘규제왕국’의 오명에서 벗어나야 우리 경제가 살아나고 국민 생활도 편안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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