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유럽의 허브 우크라이나 크림반도가 심상치 않다. 우리나라 면적의 6배가량을 차지하는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동쪽이며 러시아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우크라이나는 관할지역으로 자치공화국 크림반도를 부속하고 있으며, 이 크림반도는 동북부에 있으면서도 얼지 않는 땅으로 지정학적으로 반도라는 지형과 함께 역사적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있기까지는 동·서 간에 뿌리 깊은 지역갈등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수도 키예프를 통과해 흑해 방향으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경계로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져 역사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문화적 차이도 있다. , 언어도 종교도 다르다.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는 러시아어, 친유럽 성향이 강한 서부는 우크라이나어를 각각 쓰고 있으며, 동부는 17세기부터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서부는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다.

그런 와중에 지난해 11월 동부 출신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협정 체결 중단을 선언, 러시아로부터 차관을 꾀하려 하자, 서부에 기반을 둔 야당세력이 불만을 가지면서 시위가 촉발됐다. 시위는 우크라이나 자체의 지역갈등과 함께 러시아와 유럽, 미국 등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사상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반도 국가는 대륙과 해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허브이자 교두보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유로 예부터 열강들의 군침의 대상으로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은 역사를 지녀 왔음을 그 역사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한반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가 외세로부터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데는 우리의 미련함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따라서 한반도와 유사한 역사와 반도적 지형을 가진 동부유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로 인한 최근 사태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과거 해방 후 이 한반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신탁과 반탁 운동, 미국을 위시한 서방진영과 구 소련진영과의 쟁탈전이 온 나라를 달구었던 부끄러운 역사가 고스란히 오버랩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국기를 가졌으면서도 친러와 반러를 외쳐야 하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시대적으로도 걸맞지 않아 보이며 왠지 불행한 앞날을 예고하는 전주곡과도 같아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 크림반도는 열강들의 패권경쟁이 치열하던 19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충돌로 소위 크림전쟁이라는 인류사에 있어 씻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 됐던 무대로도 유명하다. 18537월 러시아가 투르크 제국과의 경계에 있는 도나우강 연안의 공국들(지금의 루마니아)을 점령하자 투르크 제국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강경하게 맞섰다. 3년여간의 긴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연합군을 형성케 했으며, 급기야 오스트리아까지 연합군에 가담하겠다는 선전포고로 러시아는 마침내 1856년 파리강화회의(파리조약)를 받아들임으로써 3년여에 걸친 전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크림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있다.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가속화될 때 러시아의 눈은 단연 크림반도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육로로는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부동항(不凍港)이 없는 입장에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와 중동 즉,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에서 볼 때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내지 정치적인 표면적 이유 이전에 그 이면에는 종교적 이유가 직접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종교의 궁극적 이념은 평화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에 있어 전쟁의 원인이 돼 왔던 것은 늘 종교문제였으니, 이 크림전쟁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의 기독교 성지 지배권을 놓고 가톨릭과 정교회가 충돌하면서다. 당시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가톨릭 국가의 종주국이 되고자 오스만투르크족에 대한 가톨릭의 보호와 권위를 인정하라고 압박해 왔다. 이에 투르크 측은 러시아를 투르크 제국의 정교회 보호자로 1774년 조약을 들어 거부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신 해군력을 앞세운 무력시위에 못 이겨 투르크 제국은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결국 투르크 측은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기독교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스 정교회 측이 갖고 있었던 성지와 예수탄생교회의 열쇠를 프랑스와 바티칸에 넘기고 만다. 뒤늦게 알게 된 러시아는 즉각 반발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했으며, 나아가 그 무력시위는 크림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렇듯 이 크림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남기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 현대전의 간호체계와 간호병사 등의 기원이 됐으며, 영국의 플로란스 나이팅게일이라는 전설 같은 백의 천사의 활약상을 볼 수 있게 한 무대가 됐고, 타임즈의 윌리엄 러셀 같은 종군기자들이 처음으로 전쟁터에 투입됨으로써 전쟁의 참혹한 장면들을 본국으로 보내 보도하게 하는 등 수많은 에피소드와 함께 현대전의 모태가 되었으며, 반면 각종 질병과 함께 약 25만 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담보로 하며, 러시아의 패배로 전쟁은 끝이 났다.

이 크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패배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계사의 판세를 뒤바꾸며 새로운 질서와 구도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크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결국 흑해의 부동항을 잃게 됐으며, 이는 남하를 위한 새로운 부동항을 찾게 하는 이유가 됐다.

그 결과 서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가 크림반도라면 동쪽으로는 한반도였다. 이 한반도와 동해로의 남하를 위해 블라디보스톡이라는 새로운 부동항을 찾아 건설하게 했다. 러시아 극동함대를 주둔시킨 블라디보스톡(‘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가짐)은 그야말로 동방의 진주와도 같았다. 이 같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게 됐고, 이어 영일동맹을 맺으며 한반도의 영향권이 일본으로 옮겨지며 일본의 한반도 식민시대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환경과 여건은 조성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세계사는 오늘의 우리의 역사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전쟁의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를 오늘의 우크라이나 사태 아니 크림반도를 놓고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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