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아직 여명(黎明). 겨울 한철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게으름 피우고 지냈다. 소한부터 우수라는 절기 사이, 찬 공기에 놀라 눈을 떴다가도 다시 몽롱한 무의식에 침잠해버린 시간이 무릇 얼마인가. 이미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난 새벽. 흩뿌리는 진눈깨비 속에서도 산수유는 피어나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어 이불을 박차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겨우내 외면했던 골프채를 챙겨 연습장으로 향한다. 모처럼 마시는 이른 아침 공기가 맑다. 공이 잘 맞건 안 맞건 상관없다. 운동 시작 후 근 한 시간쯤 지나자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온 몸의 세포들이 하나씩 하나씩 깨어나 눈 뜨고 숨 쉬기 시작한다. 찌뿌듯한 몸이 나름 균형을 잡고 오랫동안 막힌 듯했던 체내 기혈이 다시금 제대로 순환되는 것만 같다.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차 한 잔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잔잔한 눈웃음과 함께 목례를 나누거나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정겹다.

갑자기 한 쪽 편이 시끌벅적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다 결국 언성이 높아진다. 끝내 얼굴 붉히며 싸운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오는 대화 내용에 담긴 불편한 진실’. 어제 필드에 함께 라운딩 나갔던 둘은 약간의 내기를 했다. 내기 방법을 둘러싸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것. 문제는 걸린 돈의 액수보다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과 자존심. 두 사람 다 기분이 상했는지 이른 아침부터 어제일을 따져 물으며 복기(復棋)한다. 묵묵히 스윙 연습에 몰두하던 손님들은 방해꾼이 된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끌끌 혀를 찬다. 그래도 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다툼을 계속한다. 이쯤 되면 가볍고 상쾌해야 할 아침이 돌연 무겁고 우울해진다. 귀중한 아침 시간이 안타깝고 짜증나는 시간으로 변하는 듯하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오래된 상가 빌딩이 하나 있다. 건물주는 80대 노인 Y. 경기도였던 일대 땅이 오래전 서울시로 편입돼 개발됐다. 대대로 농사꾼이었던 Y씨는 이웃들과 함께 일약 고액 임대료를 월세로 받으며 사는 땅부자로 변신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흘렀다. 건물 4층에 건물관리실이 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이곳에 모인다. 말하자면 경로당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 Y씨처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밭 덕분에 갑자기 졸부가 된 노인들. Y씨 등은 대부분 정오 이전에 이곳에 출근(?)해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붉그레한 얼굴로 술냄새를 풍기며 퇴근(?)한다. 무려 삼십 년째. 이들은 맨날 화투이고 맨날 술, 맨날 혀 꼬부라진 소리에, 맨날 비틀거린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모두 수십 년 된 이웃, 어릴 적 코흘리개 동무인 동시에 수십 년 술친구, 고스톱친구인 셈이다. 노인들이 즐기는 놀이의 종류엔 포커도 있고 마작도 있단다. 꽤 수준급 경기가 벌어지는 듯.

이웃 사람들은 이들이 무슨 짓을 하건 자신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주는 일이 없으므로 별로 이에 관여치 않는 눈치다. 그러나 눈을 흘기는 이들도 있다. 세상에 할 일도 많고 좋은 일도 많을 텐데 돈 많다는 지역 유지들이 허구헌날 저렇게 모여 고스톱으로 허송세월이냐는 것. 어떤 이는 얼마 전 서울 강서구에서 수천억 원대 자산을 굴리던 이가 늦은 밤 관리사무실에서 살해됐지만 그처럼 돈 번 사람들이 돈과 시간을 쓸 줄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노인들의 화투놀이는 일시 오락이지 도박까지야 아니라고 하겠지만 일요일까지도 꼬박꼬박 개장(?)되는 것을 보면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사행심은 인간 본능인가.

최근 모처럼 경찰의 집중단속으로 불법게임장 52곳이 적발돼 업주 등 66명이 구속되고 게임기 2천여 대가 압수됐다. 이들은 불법 사행성 게임기인 바다이야기나 환전(換錢)이 가능한 포인트카드로 사행성을 조장해왔다. 단속은 지난달 한 40대 남성이 쌍문역 게임장에서 돈 수백만 원을 잃었다. 지금 죽으러 간다. 시신만 찾아 달라며 경찰에 신고한 데서 비롯됐다. 불법게임에 미쳐 매일 몇 시간씩 매달리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 남성은 다행히 경찰이 찾아내 가족에게 무사히 인계됐다. 우리 주위엔 불법게임장이 너무도 많다. 단속의 손길이 느슨한 점을 틈 타 이젠 주택가까지 파고들었다. 한탕주의때문 아닌가.

한반도는 심하게 말하면 도박공화국이다. 버젓이 현금으로 거래되고 있는 고스톱 포커 같은 온라인 웹보드 게임이 애초에 왜 제도적으로 허가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 리니지게임에 빠진 청소년 유저들이 돈 따먹기를 위해, 게임용 무기 거래를 위해 밤을 지새기 일쑤인 것을 아는가. 사법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다른 큰 범죄와의 전쟁으로 바빠서 그런가. 그렇다면 국정원댓글사건이나 서울시공무원간첩증거조작 의혹 등은 왜 시원스레 파헤치지 못 했으며, 왜 정치권에서는 무슨 일만 터지면 특별검사제 도입이 거론되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의 전령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봄은 즐기는 이의 것일 터. 산책길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봄꽃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다. “그대들, 정녕 봄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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