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동대지진 대학살 일제만행 현장(1923년). 일본 자경단에 의해 살해되어 넓은 공터로 이송되어 온 것으로 본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공식집계 6000여명, 비공식집계 2만여명 피살 당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일본에는 진도 7 이상 규모의 대지진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을 기해 관동(關東, 간토) 지방을 초토화로 만든 사건, 이를 ‘관동(간토)대지진’이라 부른다.

이 지진으로 인해 도쿄는 4분의 3이 잿더미가 됐다. 동경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 200여 명이 생화장 당하고, 주민 약 3만 8천 명이 한꺼번에 타죽는 등 아비규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불에 약한 목재건물이 즐비한 곳은 화마로 둘러싸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러자 일본 내무성은 각 지역 경찰서에 ‘치안유지’를 지시했다. 지시 사항 중에는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언론에 보도됐고, 더욱 부풀어지고 과격해져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으로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낭설임에도 불안감과 공포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강렬한 적개심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에 대한 공격적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급기야 민간인들은 ‘자경단’이란 조직(전국 3689개)을 꾸려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했다.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어려운 일본 발음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면 가차 없이 살해했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올라온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 받고 살해당했다. 자경단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했다.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대부분이 노동자였다. 공부하러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일제의 토지수탈 정책으로 농토를 유린당한 노동자들은 헐값에 노동력을 팔며 힘겹게 살았다.

일본 치안 당국은 대지진 후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 아래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했다.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했다.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자 그제야 개입했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 자국민이 학살당한 후였다.

지난해 11월 도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의 기록에 따르면 전체 피해자 23만여 명 가운데 관동대지진 때 피살된 인원은 250명이다. 하지만 공식집계로는 6000여 명, 비공식집계 2만여 명에 이르는 피살자가 발생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 내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들을 무참히 죽인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민중 항쟁의 씨를 말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참상(慘狀)이다.

▲ 일본 자경단들이 죽창과 쇠꼬챙이를 들고 코를 막고 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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