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활약한 선수 중 최고의 선수, 이른바 MVP(Most valuable player)가 누구일지는 모르겠다. 소문대로 쇼트트랙의 천재 안현수가 그 영예를 안는다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한국인의 핏줄이다. 한국의 아들이다. 그의 선택에 의해 러시아로 국적이 바뀌어 이름도 ‘빅토르 안’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피가 바뀌고 한국인을 닮은 얼굴 형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는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거머쥐었다. 그가 벌이는 경기는 매 순간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가슴을 졸이게 했다. 스포츠 경기를 보는 재미가 그런 것이지만 그의 기량은 단연 압권이며 세계 최고였다. 그가 소치올림픽의 MVP로 선정된들 누가 감히 시비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러시아 국기를 펼쳐 보이며 경기장을 도는 모습을 볼 때는 적잖이 착잡한 소회를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태극기가 들려 있었어야 할 그의 손에 왜 러시아 국기가 들려 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의 영광은 그를 낳아 기른 바로 우리 한국의 영광과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에 애써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국제 올림픽은 각국에서 뽑힌 발군의 선수들이 모여 들어 기량을 뽐내며 겨룬다. 그렇기에 올림픽에 뽑혀 나가는 그 발군의 무리와 뒤섞여 겨루는 한 성원이 된다는 그 자체, 그러니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선수 개인에게는 일생일대의 대단한 영광이다. 더구나 거기서 선망의 금 은 동 메달을 거머쥐는 세계 1위 2위 3위를 차지한다면 그 영광은 개인을 넘어 가문과 국가에 미친다.

따라서 올림픽 메달을 따기 위해 선수 개인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선수를 뒷받침하는 국가들의 노력은 선수들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하다. 역대 올림픽의 경험으로 보아 국가별 메달 집계의 순위는 국력의 순위와 엇비슷하다. 그것이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것은 국제 경기에서의 성과라는 것이 그것을 위해 들이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투자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투자의 규모는 국력이 좌우한다. 그렇다면 올림픽에서의 성과라는 것도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국가별 스포츠 환경의 산물이다. 국력이 약한 나라는 올림픽에서 상위 성과를 거둘 만한 투자를 감행할 여력이 없다.

올림픽은 밤을 잊고 경기를 지켜보는 범세계적인 시청자와 관중을 가지므로 최고의 국가 홍보 무대이다. 이는 올림픽이 스포츠 행사를 통한 인류 화합과 세계 평화의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수단이 되어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입할 여지를 넓혀주게 된다. 올림픽 개최지에는 각국 정상이 모여든다. 그렇게 되면 올림픽 무대는 스포츠 행사장일 뿐 아니라 정상 외교 무대로서도 관심과 흥미를 끈다. 정치적 의도가 개입한다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인 것은 분명하다.

올림픽은 개최 준비에 막대한 재원이 소요된다. 그러한 일은 일개 국가의 정치 및 권력기구들이 총동원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여주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만약 국내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 무용(無用)한 일이라면 원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소치올림픽의 경우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국가 홍보와 거기서 파생되는 국익, 국가 원수 푸틴의 위상과 이미지 제고라는 정치적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면 열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처럼 올림픽의 출발 이념은 숭고하고 순수했지만 그것이 점차 뽕도 따고 임도 보는 식으로 변질해가면서 정치적 또는 상업적 오염도가 심화되어 가는 것은 틀림없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빅토르 안의 경우가 말해주듯이 다른 나라의 우수 자원을 끌어들여 자국의 메달 획득 수를 늘이려 급급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은 마치 수입으로 직결되는 승리만을 위해 다국적 선수 영입을 서슴지 않는 각국의 프로 축구나 야구, 배구, 농구 등의 프로 스포츠 팀을 운영하는 상업적인 흥행 마인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올림픽 때마다 불거지는 부정 심판 시비 또한 올림픽 정신의 오염을 여실히 웅변한다. 부정 심판 시비는 선수 개인 차원에서 빚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적 공명심이 빚어낸다. 심판을 매수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특정 국가 선수에 호의적인 사람들로 심판진을 구성한다거나 채점 방식을 조정하는 따위의 수법은 금방 들통이 난다. 관중의 눈을 속일 수 없을 뿐더러 심판의 공정성을 심판하고도 남을 능력을 가졌으면서 경기를 지켜보는 예리한 전문가가 수없이 많다. 소치올림픽에서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팅의 대명사 한국의 김연아 선수가 그 희생자가 됐다는 것이 분통터진다.

국가적 공명심이나 사악한 정치적 의도와 공모한 부정 심판이야말로 올림픽 정신을 근본부터 무너지게 한다. 꼭 한국 선수를 대상으로 했다 해서가 아니라 올림픽이 번번이 부정 심판 시비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올림픽 행사의 전반(全般)이 혁신적으로 오염에서 벗어나 리모델링되며 개보수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을 갖는다.

김연아 선수는 비록 심판의 비양심적 소행에 의해 금메달은 빼앗겼으나 그에 홀린 세계인들은 그가 진정한 승자임을 이의 없이 인정한다. 그의 은메달은 러시아 선수의 금메달보다 훨씬 더 빛을 발한다. 이처럼 올림픽에서 관중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판정이 계속되는 한 올림픽은 지구상 최대 최고의 스포츠 제전으로서의 공신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

은메달을 따고도 김연아가 진정한 승자인 것은 그가 보여준 의연함이었다. 들끓는 판정 시비 속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짐을 내려놓아 홀가분하다’ ‘금메달은 나보다 더 절실한 사람에게 간 것 아니냐’고 했다. 모두가 그의 표정과 소감을 주목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에게서 억울함이나 원망, 서운함 같은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대단한 인격이며 도량이고 여유다. 이렇게 그는 은메달을 따고도 세계인을 홀렸다. 국가 홍보와 관련해 공을 따진다면 금메달리스트보다 김연아의 공이 오히려 더 크고 빛나는 것 같다. 빅토르 안이 기량 면에서 올림픽 MVP일지는 모르나 올림픽 전인(全人) MVP는 김연아다. 김연아는 스포츠를 통해 도(道)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그에게서 심판도 러시아 금메달리스트도 올림픽 관계자들도 많이 배웠을 것이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김연아가 있어 한국 사람인 것이 더더욱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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