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이후 쇠퇴한 유교, 오늘날 회복 위해 교육에 힘써

▲ 유교의 의례 중 하나인 관례와 제례. ⓒ천지일보(뉴스천지)

◆유교의 유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어 온 민족이다. 또한 이를 근본으로 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오랜 기간 자손들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왔고, 이는 조선시대 활발한 유교문화와 함께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로 자리잡았다.

유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했던 공자를 일반적으로 창시자로 여긴다. 고대 중국에서는 기원전 23세기경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덕치주의를 펼친 이래, 하늘을 숭배하고, 조상을 공경, 사람을 사랑, 자손을 돌보는 아름다운 전통이 몇몇 성왕들에 의해 전해져 왔다.

공자는 이들 성왕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가르침(道)을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악경(樂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옛 경전들을 집대성하고 체계화시켰다. 이로 인해 ‘공자교’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공자가 죽은 후 맹자가 더욱 발전 시켰기에 ‘공맹교’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자는 새로운 가르침을 베푼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알고 보존해 새롭게 적용한다’는 뜻으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했기에 유교의 창설자도 아니고 교주도 아니라는 일부 의견도 있다.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공자를 신으로 숭배했고 공자가 죽은 지 500여년 후에는 국교가 됐다.

이 유교 사상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일부 학자들 가운데서는 공자의 학문이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의 ‘한마음(우리)’ 정서를 연구해 정리한 것이라며 유교의 뿌리 자체를 한국에 두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유교가 언제부터 들어온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소수림왕 때 유교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공자시대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있다.

▲ 공자의 삶을 그린 판화. ⓒ천지일보(뉴스천지)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현재 유교는 정부에서도 종교로 인정하고 우리나라 7대 종단의 하나로 분류해 놓은 상태지만 아직까지 유교를 종교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로 인해 이견이 분분하다. 이는 대다수가 유교의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보다는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유일의 유교이념인 ‘인의예지’를 교시로 삼은 성균관대, 유학과에서도 유교의 종교적인 면을 교육하기보다는 학문적인 측면에서 가르친다.

지난해 성균관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일부에서 유교의 종교성을 부인하는 이유 중 하나가 ‘유교는 학문을 가장 중대시하기 때문에 이웃 종단과 달리 성직가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또, 타 종단에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정규과정이 존재하지만 유교에는 이러한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구별된다. 또, 유교는 성직자와 신도의 구별이 없다. 이러한 점이 타 종교와 다른 점이다. 하지만 성직자는 없어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다.

총회본부 개념의 성균관에서 성균관장이 유교의 수장이고, 지방 향교에는 향교의 책임자 전교가 있다. 이들이 성직자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역할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성현들에게 분향을 하고, 춘추로 석전을 올리며 유교의 성인을 추모하는 제향 기능을 담당한다.

또, 전교를 보좌해 분향과 석전을 진행하는 장의가 있는데 장의는 6개 부서로 구성돼 있으며, 대부분의 향교 산하에는 약 295개 지부로 구성된 유도회가 있다. 여기서는 사회교화운동을 주요한 사업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각 지부의 책임자를 지부회장이라고 칭하는데 이들이 전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딱히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유교의 역사

우리나라의 유교 역사를 보면 고구려 소수림왕이 유교학교를 세웠고, 고려시대 태조가 정치적 이념을 유교에서 찾았으며, 8대에 와서 유교 국가를 형성했다. 무인정권 시대에 잠시 약화됐으나, 고려 말 왕성한 유학(경학, 사서오경을 연구)을 토대로 불교적인 것과 혼합됐다가 조선시대 와서는 유교가 꽃피우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유교 이념과 경전 사상에 준거해 나라를 세운 후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하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더 많은 인재를 양성했고, 전국적으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유교 교육이 이뤄졌다.

조선중기~후기에는 성리학과 실학의 유교학문을 중심으로 왕성한 연구가 이뤄져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이언적, 서경덕,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유명한 학자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향교나 서원 등이 일부만 남고 모두 폐쇄돼 위기를 맞았으나 고종황제가 다시 국교로 정한 후 회복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와서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향교가 기능을 상실한 채 광복을 맞이한 후 지금까지 흘러왔고, 기독교와 천주교의 발전에 의해 현재 세력이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쇠퇴한 유교 회복 위한 지도자 양성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유교 내에서는 각종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유림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에 신설된 전문 과정을 통해 유교 경전과 예절, 교양 등을 배움과 동시에 유교 지도자의 과정을 밟도록 돕고 있다.

또, 성균관 내부에는 여러 개의 교육기관을 둠으로써 유교 발전에 나서고 있는데 먼저 석전교육원에서는 유교의 가장 중요한 의례인 석전(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을 계승하고 보존하기 위해 학점인정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석전과정만을 가르친다.

다음 유교 경전과 한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한림원은 대부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시험을 통해서 입학하게 된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5개년 동안 교육을 받게끔 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선비학당이란 교육기관도 있다. 선비학당은 일반인도 유교를 접할 수 있도록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을 진행한다.

이밖에도 최근에는 우리 시대에 사라져가는 예의를 알리고 실천하기 위해 예절지도사를 양성하는 과정도 있다. 국가공인 민간자격으로 시험을 통과해야만 ‘예절지도사’ 자격을 갖출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과 교육과정을 통해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춰야만 성균관의 임원이 되거나 향교의 책임을 맡을 수가 있게 된다.

◆성균관·향교·서원

성균관은 유교를 대표하는 중앙기구이다. 원래 성균관은 제사와 교육 2가지 기능을 했다. 하지만 1963년도 사립학교법 제정에 의해 성균관대학교가 성균관으로부터 분리돼 교육기능을 전담하고 성균관은 제향기능만을 담당하게 됐다.

성균관대학교는 유교의 구성원인 유림에 의해 설립됐지만 현재는 완전히 독립된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실질적인 유교교육보다는 보통 일반대학교의 기능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유교의 세력이 더 약화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성균관의 하부조직인 향교는 지방 공립학교로서 성균관의 기능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향교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의 기능을 상실하고 성균관과 비슷한 역할을 가지고 지방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향교는 전국 234개 정도가 있다. 또 향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서원이 있는데 현재 40여개 정도가 있다. 일부 서원만 교육의 기능을 하고 있고 나머지는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여러 가지 의례

▲ 신위 앞에 술을 따르고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가장 대표적 의례로 중요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된 ‘석전대제’가 있다. 산당이나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공부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드린다.

특히 매년 5월 11일 공자사망일과 9월 28일 탄신일에는 대규모로 제례의식을 가진다. 다음 ‘종묘대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종묘(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 사적 제125호)에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드리는 예식이다.

여기에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1호)과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 56호) 등의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의식이 포함돼 있다.

종묘제례는 의례절차, 음악, 제기, 악기와 의장물, 무용 등이 잘 조화됐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를 자랑한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된 22곡을 연주하고 팔일무 등의 춤을 춘다. 이어 ‘사직대제’는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제사로서 자연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조선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세우고, 각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백성의 평안함과 풍년을 기원했다. 매년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날 밤에 지낸다.

또 매년 성년의 날(5월 셋째 월요일)이면 남자는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고 관을 씌우는 ‘관례’와 여자는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해 성년이 되었음을 알리고 축하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를 비롯해 혼례(결혼식), 상례(장례식), 제례(제사) 등을 총칭한 ‘관혼상제’ 역시 유교의 대표적인 의례이다. 이밖에도 분향, 고유, 공부자탄강기념일(음력 8월 27일) 등의 의식이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