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묵자가 활동한 춘추전국시대는 대란의 시기였다. 이 대란은 중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한 기회와 변화의 시대였지만, 그것은 엄청난 혼란과 희생을 극복한 이후의 결과론이다.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 가운데 권력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거나, 기회를 이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천하의 대란은 곧 최악의 조건이었다. 혼란의 양상을 지켜보던 공자는 문제의 원인이 예악(禮樂)의 붕괴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공자의 후세대였던 묵자는 예악으로 해결할 세태는 지났다고 판단했다. 세상은 이미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것이 상식이었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하는 것이 정의였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우둔한 사람을 속이는 것은 지혜였으며, 귀족이 천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질서였다. 맹자도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야수를 데리고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위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은 같았지만, 제자백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달랐다.

‘천하의 이익을 위하고, 천하의 해악을 없애는 것’이 고통을 감내하며 전력을 다해 이룩하려던 묵자의 목표였다. 천하해악의 뿌리는 무엇인가? 원인과 현상에 따라 해결방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전통의학에서는 ‘변증시치(辨證施治)’ 또는 ‘대증(對證)시치’라고 한다. 천하의 해악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결국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만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의 사사로운 이득을 위하여 남의 이득을 해치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이기적인 사람은 천하의 공리(公利)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니, 이러한 풍조가 만연된 사회에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애(自愛)’의 결과이다. 자애와 불상애가 만연하면 반드시 사람들끼리 서로 공격하고, 빼앗고, 적대시한다. ‘불상애’를 없애는 것만이 ‘천하의 해악을 제거하는’ 근본적인 치료이다. 이것이 묵자의 ‘겸애’이다. 묵자의 사랑에 대한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지만, 그가 ‘사랑(愛)’을 사상적 키워드로 삼은 목적을 이해하면 본래의 의도도 이해할 수 있다. 묵자에게 유가의 인(仁)은 ‘자기애(體愛)’에 불과했다. 체(體)는 ‘아우름(兼)’에서 분리된 개체이다. 그는 유가의 인과 상대적 개념으로 겸애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체애’는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랑, 곧 유가가 주장하는 친친(親親)을 기준으로 하는 차별적 사랑이다. 친친에 의한 사랑은 결국 ‘자애’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묵가의 주장은 겸애를 강조하기 위해 유가의 인을 억지로 축소한 측면도 있다.

인을 체득한 군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인을 베푸는 지도자다. 군자의 목표는 추상적인 이상의 설정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천하의 이익을 달성하되 예를 수단으로 삼고, 의로 화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하며, 확고한 소신으로 이러한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묵자는 유가가 주장한 인이 소인의 사랑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왜 그런가? 예를 들어서 부모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거나,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욕심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의 희생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유가가 인의 구체적 실천수단으로 제시한 예의 핵심은 결국 자기와 가까운 순서로 확대된다. 공자는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황금률을 제시했지만, 내가 하기 싫은 것이 기준이지 남이 하고 싶은 것이 기준은 아니다. 묵자는 남이 하고 싶은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나와 남이라는 대칭적 관계에서 우선을 두는 기준은 유가와 묵가가 완전히 반대이다. 묵자가 생각한 유가의 인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자기를 중심으로 약간 확대된 사랑에 불과하다. 묵자의 겸애는 박애(Philanthropy)의 근본적 의미와 다르지 않다. 박애는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된 그리스 말기의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냉정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극기, 절제,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 학파의 보편적 사랑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박애는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정치이념 형성에 기여했지만, 오늘날에는 자선(慈善)이라는 축소된 의미로 사용된다. 사랑의 개념도 이렇게 축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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