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중략)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최승호, 대설주의보)’

난로를 따뜻이 데우는 한 줌 톱밥 같은 시. 한 줄의 시가 위로가 된 시절이 있었다. 이 시는 80년대 폭압적인 시대상황을 거센 눈보라에 비유하며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들 한다. 세상이 하얘져 아름답지만 지구촌을 덮친 뉴 밀레니엄 폭설은 아직도 재난이다.

오호 통재라. 또 인재(人災).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재난을 이겨내야 할 위기 상황이었던 17일 밤. 대부분 방송은 웃고 떠드는 녹화 프로를 그대로 내보냈고, 갑작스런 사고에 대응하는 우리의 접근방식은 구태의연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에, 성수대교 붕괴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참사를 수차례 겪고도 말이다. 강추위 속에 밤샘 구조작업에 여념이 없었던 이들의 수고에 비해 너무 주먹구구식이었던 재난 방재시스템. 눈이 쌓여 있어 응급구호 차량들의 진입이 여의치 않았다. 왜 먼저 제설차량이 신속히 눈을 치우고 길부터 뚫지 않았는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데, 초를 다투는 구조작업이 재빨리 이뤄졌다면 귀한 목숨을 더 건졌을 지도 모르는데대기업 계열사가 운영하는 리조트니 괜찮겠지 하고 막연히 믿었던 사람들은 땅을 치고 울부짖고 있다. 부패한 군대 문화의 유산인 빨리빨리 악령이 만든 참사. 눈 무게조차 이기지 못한 날림 건물 샌드위치 패널이 꿈 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한꺼번에 앗아가다니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뼈를 깎는 각오로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상은 달콤한 쾌락과 갑작스런 재난, 희로애락이 뒤섞인 곳. 세사(世事)의 번란과 명리를 다 뿌리치고 깊은 산 속에 은거하다 눈 내리는 날 활연대오해 속세의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된 이도 있다. 소요태능 혜감국사는 묘향산에서 휴정 청허 선사로부터 20세에 가히 우습도다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 소를 다시 찾다니라는 게송을 받았다. 국사는 게송을 들고 20년간 운수납자로 전국 각지를 주유하며 선지식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뜻을 깨치지 못하고 결국 스승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1년간의 용맹정진을 거쳐 한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때마침 내린 폭설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에 이른다.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집안의 돌을 모두 밟았네/ 돌아보면 밟은 자취도 없고/ 본다는 것도 이미 고요하여라/ 분명하고 둥글어 깎아지른 듯한데/ 그윽하여 광명은 빛나네/ 부처와 조사와 산하까지도/ 입 없이 모두 삼켜버렸네

선사의 게송은 마음이 공()하니 급제했노라라는 방거사의 사자후에 맥이 닿는다. ()이란 존재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일 터. 불국토를 감히 백설이 내려 쌓여 하얘진 세상에 비유해 보았지만 어찌 필설이 닿을 수 있을까. 둔감한 근기(根器)의 필자,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무심코 인도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을 펼쳐본다.

“‘란 자아 혹은 라는 생각이다. ‘라는 생각이 일어난 후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라는 생각부터 없애라.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라. 그것의 근원을 찾아내라. 그러면 라는 생각의 뿌리가 뽑히고 순수한 희열이요 존재이자 불멸의 의식인 참나만이 남아 빛난다. 진정한 참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무한하고 완벽한 이다.”

선학의 황금시대’. 이 말은 세계적인 석학이었던 중국의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 오경웅 박사의 저서명이기도 하다. 눈 내리는 지구촌, 그리고 한국은 과연 어떤 시대인가. 돈이 최고이고 브랜드나 스펙이 최고인 허위의식의 황금시대는 아닌가. 지나친 경쟁에 청년들의 가슴이 아프게 멍들고 있지는 않은가. 버젓이 활동할 겉치레 하나라도 없으면 살기 힘든 나라는 아닌가. 우리에게 엄연히 내재된 불성(佛性)을 찾기는커녕 도토리 키재기 식 세속적 성공과 탐욕에 허무하게 쫓기고 쫓기는 인생은 아닌가. 남들이 재단하는 잣대에 맞추기에만 급급해 소중한 내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학의 황금시대가 그립다. 눈 내리는 날 마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기개를 내보여준 방거사와, 소요태능이 다녀간 이 땅에도 당시처럼 눈이 내려쌓인다. 필자의 쓸데없는 단상(斷想)들을 무심(無心)으로 덮어주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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