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명(明)나라 이시진(李時珍)이 그 유명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대해 이시진 후 명말청초시기의 방이지(方以智)는 <물리소식(物理小識)>에서 말하길 “주자의 시에 ‘콩을 심으나 줄기와 잎이 드물어 힘을 다하나 알맹이가 이미 썩었네. 회남왕의 기술을 일찍 알았더라면 편안히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라는 구절이 있는데, 아마도 ‘본초’에서 말한 두부가 회남왕 유안이 만들었다는 말을 인용한 것 같다(권6 참고)”고 했다.

이에 근거하여 어떤 이는 주희의 “이 시는 아마도 명대 사람이 유안이 두부를 발명한 것으로 오해하여 후에 근거 없이 잘못 전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원한청(袁翰靑)의 ‘생물화학의 발전’에 관한 한 가지 의견(關于 ‘生物化學的發展’ 一文的一点意見)에 수록된 <중국화학사논문집(中國化學史論文集)> 참고).

또 원한청의 <두부의 기원문제에 관하여(關于豆腐的起源問題)>에 수록된 <중국과기사료(中國科技史料, 1981년 제2기 참고)>, 세계에서 권위 있는 <간명불열전백과전서(簡明不列顚百科全書)>에도 ‘두부’에 대한 전문 항목이 있다. 이 책에서는 “두부의 제작 기술은 한나라(기원전 206-서기 220년)때 시작되었다”고 여겼다.

<간명불열전백과전서(簡明不列顚百科全書)>는 두부의 기원을 4백여 년이라는 장기간의 과도기를 거친 것으로 보고 결코 어느 사람 어느 시기에 발명된 것이라 단언하지 않아 앞의 견해와 비교하면 지극히 신중하다.

만약 두부가 한나라 초기 유안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면, 그 시기 혹은 후대의 그와 가까운 문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어야 마땅한데 양한(兩漢), 삼국(三國), 양진(兩晋), 남북조(南北朝)에서 수(隋) 및 당말(唐末)에 이르기까지의 9백 년 동안 사람들은 여태껏 두부와 두부제품과 관련된 확실한 문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중설을 이야기 하자면, 5세기에 출판된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은 중국 최초로 농산품 가공을 기록한 체계적인 농서다. 이는 “농경을 시작한 때부터 육장을 만들기까지 생업에 관련된 자료는 쓰지 않은 것이 없지만(起自耕農, 終于醯醢, 資生之業, 靡不筆書)” 책 중에 음식물 제작에 대한 수많은 기록 중 두부에 관한 것은 없다.

기타 보통 음식물의 기록이 비교적 많은 농가(農家), 음식과 요리, 의가(醫家), 본초의방(本草醫方), 잡가(雜家) 등과 관련된 서적 및 풍부한 당대 시문에도 두부는 줄곧 종적이 묘연하다. 설마 기록을 빠뜨린 건 아닌가? 이는 이치상 그다지 가능성이 높지 않다.

따라서 원한청, 조원우(曹元宇) 등은 모두 두부가 한나라 초기 유안이 만들었다는 설을 부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이는 새로운 이론으로 두부의 기원이 한 대라는 설을 지지한다. 이들은 중국 고대에 콩을 먹었던 역사가 오래되었고 게다가 ‘맷돌’이라는 양식 가공 도구가 옛날부터 있었으며 유안은 연단술(화학)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한 대에 두부가 발명되었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유안이 황로술(黃老之術)을 연구하여 그와 동반하는 수련승이 장기간 채소를 먹으니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두부를 연구하고 만들어 그에게 바쳐 맛보게 하였으므로 두부의 발명권이 유안의 명의로 되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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