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십 수 기의 병졸과 본대를 떠나 귀대하던 이광은 뜻밖의 흉노군 수천 기와 맞닥뜨렸다. 그는 곧장 도망가지 않고 되레 적진 코앞까지 가서 말 안장을 풀고 휴식을 취한다. 부하들이 불안에 떨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적진에서 순찰 중이던 흉노의 장수까지 활을 쏘아 죽이고 진영으로 돌아와 태연히 휴식을 취했다. 흉노에게 유인 부대로 보이기 위해서였다.

저녁 무렵이 다가왔다. 흉노군은 여전히 한나라 군을 의식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흉노군은 한나라 군의 복병이 곧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워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이광은 다음 날 아침 무사히 본대로 귀대할 수 있었다. 이광이 적진 한가운데 있을 때 본대는 원래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광의 행방을 몰라 뒤쫓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무제가 즉위했다. 무제의 측근들은 모두가 이광이 명장이라고 칭찬했다. 그리하여 이광은 상군 태수에서 앙궁(옥좌가 있는 곳)의 위위로 임명되었다. 그 때 장락궁(태후의 거처)의 위위로 임명된 자는 정불식이었다. 그도 이광처럼 변방의 태수로 있으면서 흉노 토벌 작전에 종사해 온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군사를 지휘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이광의 군대는 행군 중에도 대오와 진형이 멋대로이고 호수나 초원이 나서면 군사들과 말을 쉬게 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게 한다. 밤에도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군의 본영에서도 기록과 장부들을 모두 간단하게 했다. 다만, 척후만은 멀리까지 내보냈으므로 적의 습격에 의한 피해는 입지 않았다.

정불식은 군대의 편성으로부터 대오와 진영에 이르기까지 독 같았고, 밤에는 경계를 강화하고 장부 등도 부하에게 상세히 기록하도록 했으므로 병사들은 숨 돌릴 사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도 일찍이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

두 사람 지휘의 차이점에 대해 정불식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광의 군율은 너무 느슨하여 기습을 받으면 조금도 버티지 못한다. 그러나 병졸을 자유롭게 행동하여 이광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자들뿐이다. 우리의 군율은 엄하여 기습을 받아도 꿈쩍 않는다.”
당시 변방의 사람들은 이광과 정불식을 어디에 내놓아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명장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흉노는 이광의 군대를 몹시 두려워했다. 병졸 또한 정불식보다 이광의 밑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정불식은 경제 때 종종 황제에게 직간하여 인정을 받아 태중대부로 승진했다. 그는 청렴하고 법에 충실한 무장이었다.

얼마 뒤 한나라는 마읍성으로 흉노를 끌어들여 부근 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그들을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광은 요기 장군으로 호국 장군 한안국의 지휘 아래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흉노에게 사전 발각되어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

그로부터 4년 뒤 이광은 위위에서 장군으로 승진하여 안문에서 흉노 공격을 위해 출전했다. 그러나 적의 대군을 만나 패배하였고 그 자신도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선우는 예전부터 이광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잡으면 반드시 산 채로 데려오라고 명령해 놓았다.

때마침 이광은 잡혔을 때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흉노 기병은 말 두 마리 등에 들것을 얹고 그 위에다 이광을 누인 채 선우의 본진으로 행했다.

이광은 죽은 척하고 들것에 흔들려갔다. 10리 쯤 가다보니 곁에 흉노 소년이 보기 드문 준마를 타고 있었다. 이광은 봇도랑 건너 뛰듯 그 말에 건너 뛰어 흉노 소년을 밀어뜨리고 빼앗은 활로 힘껏 말을 때렸다. 흉노는 수백 기로 이광을 쫓았으나 그는 빼앗은 활로 적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추격을 뿌리칠 수가 있었다. 단숨에 수십 리 길을 달려간 이광은 도중에 패잔병들을 모아서 가까스로 진영으로 도망쳐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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