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가난하고 못사는 것은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마을이 단합하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이들이 있다. 바로 청도군민들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던 때 ‘우리 한 번 잘 살아보자’고 결의해서 똘똘 뭉쳤던 게 나라님 마음도 감동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대 새마을정신이 30여년이 지난 지금 국내에선 녹색성장과 더불어 재조명받으며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청도는 새마을운동 외에도 운문사, 반시와 감 와인, 소싸움축제 등으로 유명하다. 밖으로 뻗어 나가는 깨끗한 물과 산으로 둘러싸여 맑은 공기와 다양하고 풍족한 과일을 선물하는 청도는 방문객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예사롭지 않은 전설과 유래를 가진 청도를 찾았다.

 

▲ 경북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에서 바라본 비슬산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명의 유래

 

 

▲ 진상기 청도읍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청도라는 지명은 조선중기 이중경 선생이 편찬한 오산지에서 ‘산천이 청려하고 대도가 사통하다(山川淸麗 大道四通)는 의미에서 비롯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향토사학 회원으로 청도를 평생 연구해온 진상기 청도읍장은 이 같은 기록에 대해 “해석에 따라 다르지만 청도의 ‘도(道)’자를 단순히 길이라 보기는 어렵다”며 “청도가 옛날 조선시대 사방으로 길이 나있긴 했지만 산맥으로 길이 가려져 있고 다른 지역보다 특별나게 잘 나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대도(大道)’에서 ‘도’가 ‘길 도’로만 해석될 것이 아니라 ‘진리, 도리’와 같은 의미에서 도라고 말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즉, ‘맑은 도, 맑은 진리가 있는 곳’이란 의미다.

신라를 긴장시킨 부족국가

청도의 고대국가는 ‘이서국(伊西國)’으로 신라 유리왕 14년 때 금성(경주)을 공격해 위기에 몰아넣을 만큼 강력한 부족국가였다. 박윤제 향토사학회장은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금성 사람들이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이서국 사람들을 막아낼 수 없으니 음병(신이 은밀하게 도움을 주는 병사)들이 나와 신라군을 도와서 비로소 이서군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를 미뤄보아 이서국은 상당히 강대한 집단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1월 풍각면 성곡리 댐 예정지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가야토기가 발견되면서 청도지역이 철기문화를 빨리 받아들여 신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서국은 유례왕 14년(297년)에 신라에 복속됐고 그 후 신라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전초기지 및 화랑의 훈련장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맡아 통일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빼어난 산세와 물세

 

 

 

 

▲ 박윤제 향토사학회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청도의 산세는 ‘용이 할아버지를 돌아본다’는 회룡고조형으로 산의 지맥이 삥 돌아 본산과 마주하고 있고 외부에서 물이 유입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 상류지세가 바위와 나무로 되어있어 형세의 흐트러짐이 덜하고 청도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까지 자갈들로 구성돼 흙이 섞이지 않는다.

박 회장은 “청도에는 경주와 경계지점에서 내려오는 물과 문복산에서 내려오는 물, 비슬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는데 그 중 비슬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가장 좋은 물”이라며 “풍수지리학적으로 서쪽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물(서출동류)이 가장 좋은데 비슬산 물이 그렇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청도는 삼재불입지처로 높은 산이 둘러싸였으니 풍재(風災)가 없고, 청도지역에서 물이 생성돼 흘러내려가니 화재(火災), 수재(火災)가 없다”고 말했다.

비슬산 어원 3가지 설

특히 삼국유사를 지은 보각국사 일연이 젊은 시절 20여년간 머문 곳으로 유명한 비슬산은 그 명칭의 유래가 다양하고 흥미롭다. 인도의 스님이 이 산을 구경하던 중 비슬이라 이름 짓고 인도식 발음대로 적어 포산(苞山)이라 불리다 비슬산이 됐다는 설과 신선이 비파(琵)와 거문고(瑟)를 타는 모습 같다 하여 비슬산(琵瑟山)이라 불리게 됐다는 설이 있다.

또,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잠겼는데 비슬산의 바위가 우뚝 솟아 그 위에 배를 매었다는 배바위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바위의 형상이 비둘기처럼 생겼다 하여 ‘비들산’에서 ‘비슬산’이 됐다는 설이 있다.

박 회장은 비슬산을 중심으로 눈여겨 봐야 할 것들이 몇몇 있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 말에 따르면 농촌의 두레문화 중 풍물(농악)문화와 소싸움이 비슬산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또 특이한 점은 비슬산 주변에 석빙고가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7개의 석빙고 중 6개가 남한에 있는데 그 중 4개가 비슬산을 중심으로 분포돼 있다.  

예부터 사람 살기 좋은 곳

청도는 예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정감록에선 청도가 피난처로도 각광받는 곳이라 기록돼 있다고 한다. 한편, 청도는 땅의 76%가 산지인데 이 산지를 개간해 계단식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물 빠짐이 좋고 일조량과 기후가 알맞아 어떤 과일이라도 맛있게 잘 익는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청도에선 전국 감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청도반시’뿐 아니라 복숭아, 팽이버섯, 사과, 배, 대추 등 맛좋고 다양한 특산물들이 풍성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청도의 역사적·지형적 특징은 오늘의 청도 지역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 회장은 “흩어져 있으면 외부사람과 접촉이 잦아 정신이 흐려질 우려가 있는데 청도지역은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들어오기도 어렵지만 나가기도 어렵다. 그러니 정신이 한데 모아지지 않겠나. 예전엔 혼사도 마을 내에서 이뤄졌다. 또 무신정권시절 지나친 조세에 불만을 품은 스님이 백두대간을 점령하고 강릉 정선에서 투항했을 만큼 저항정신도 강했다”고 전했다.

또 “축제가 한번 열리면 전체 인구 4만 5천 명 중 4만 명 이상이 모인다.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자 화랑정신의 발상지인 청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정신이 앞서가거나 어느 지역보다 단합심이 높은 점 등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역사적으로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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