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에서 만난 다산 정약용

강진과 영암의 경계선에 있는 월출산은 간결하다. 몇 분 오르지 않았는데도 거친 숨을 내뱉게 하니 괜스레 체력 탓을 하게 하는 산이다. 속살을 다 드러낸 겨울 돌산, 그 산의 겨울나무들이 다산을 닮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잎사귀 몇 개를 달고서 때가 되면 찾아오고야마는 봄을 숨죽여 기다리듯 풍비박산 난 집안과 유배 18년 이후, 시대가 변하자 다산은 오늘날까지도 장춘의 빛을 누리고 있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재성보다 뛰어났던 신중함

‘열흘마다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꼬아서 끈을 만들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 표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정신이 산뜻해졌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편지가 큰 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 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기를” 또 이렇게 빌었다. “이 편지가 수백 년을 전해 내려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공개되어도 나를 조롱 하는 일이 없기를” 그런 다음에야 봉투를 붙였다. 이것이 군자의 신중함이다. 나는 젊어서 글씨를 빨리 쓰다보니 이런 경계를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중년(中年)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 하나다. 그는 편지나 일기 같이 지극히 사적인 글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사사로움은 절제했다. 세상모르게 쓰는 글이 일기요, 받는 이만 알게 하 는 게 편지라면 욕지거리 꽤나 소상하게 퍼부어도 될법한 공간인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기록으로 남겨지는 글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일 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1801년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황사영백서사건’이 그 일이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 신자였고, 신유박해(1801년 천주교도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사건, 이때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처형되고 둘째형 정약전과 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전말 보고와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해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에 보 내려다가 조정에 적발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선정부는 천주교가 인륜을 어길 뿐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더욱 탄압했으며 신유박해 때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약전과 약용은 다시 서울로 압송돼 혹독한 국문(鞫問)을 당했다. 황사영백서사건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었지만 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됐다. 정조가 죽고난 조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했던 노론벽파의 천하가 되어 그들의 정적이자 남인의 핵이었던 정약용을 제거할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그렇게 나이 마흔에 바닷가 강진까지 내몰리게 된다. 한때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전도양양했던 그였다. 스물여덟 살에 대과 장원으로 급제한 약용은 재능뿐 아니라 정조의 오래된 슬픔,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아는 신하였다.
 

▲ 다산 정약용

정조는 약용에게 수원화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내린다.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열한 살에 잃어버린 아버지 사도세자를 가까이 모시려는 계획이자, 끊임없이 왕과 개혁정치를 흔드는 한양을 떠나 토지제도를 개선하고 상업 도시를 형성해 이상 정치를 펼치기 위한 꿈의 상징이었다. 약용은 이 엄청난 과업을 정조의 기대에 넘치도록 이뤄냈다.

과학적인 설계도와 기구 제작, 공사 실명제를 시행하고 정당한 임금 지불로 부역인부들의 사기를 높여 축조 경비를 절감했다. 또 10년 안팎으로 예상했던 공사기간은 3년으로 단축됐다. 성공적인 화성 설계 이후에도 암행어사, 병조참의, 정3품 우·좌부승지 등을 거치며 이뤄낸 그의 업적과 천재성을 나열하고자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1800년 봄,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다. 그를 헐뜯는 노론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리당략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를 여 유당(與猶堂)이라 짓는데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 는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처신하라는 뜻이다. 몸을 낮추고 조심히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늘은 조용히 살고자했던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낙향 몇 달 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 출신이 많았던 천주교도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 작됐다. 형 정약종, 형수 문화 유씨, 매형 이승훈, 조카 정철 상·정정혜, 조카사위 황사영이 한꺼번에 몰살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돌아올 기약 없는 머나먼 귀양길에 오르게 됐던 것이다.

네 살부터 천자문을 읽기 시작해 열 살 전에 한시를 지었을 만큼 영특했던 그의 천재성이 선천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라면,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기성찰에 몰두했던 것은 후천적인 요인이었으리라. 능력이 뛰어난 인물에게 고난을 통해 신중함을 겸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누구의 시나리오였을까. 어쨌든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모진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신중함을 더해줬고 눈부신 학문적 성취를 남길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2편에 이어집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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