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빨리빨리

필리핀 관광지에서 현지인들이 한국 관광객들을 안내하며 이렇게 말한다. 필리핀 사람들이 외워 하루에도 몇 십번씩 쓰고 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빨리빨리를 외쳐대고 부산을 떨어댔으면 그들까지 배웠을까. 무어 그리 바쁜가. 몇 분만, 혹은 몇 초만 기다리면 안 되는가. 많은 한국인이 가진 습성이니 가히 빨리빨리병()’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 발병한 이 질병’,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이 습벽. 풍광 좋은 해외 관광지에 나가서도 버리지 못한다.

블타바 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정겹고 고풍스런 도시 프라하. 체코의 국민작곡가 스메타나의 몰다우강의 무대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몰다우(블타바) 강에 프라하성을 배경으로 놓인 샤를 다리에 배낭여행객이 많이 몰린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는 프라하는 해 저무는 오후가 아름답다. 다리엔 거리의 화가들도 있다. 프라하성에서는 고전음악연주회가 열린다. 음악회 무료티켓을 날씬한 체코 아가씨들이 행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이에 곁눈질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인증샷이다. 땀 뻘뻘 흘리며 뛰어와 쫓기듯 증명사진을 찍고 서둘러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 관광객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빨리빨리병()’의 진원지 한국. 우리 주위엔 한 박자 느려도 좋은 상황에서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 차 운전하는 게 무어 그리 대단한 위세거리인가. 1, 2초를 못 참고 귀가 찢어지도록 클랙슨 빵빵 울리는 사람들, 병원이나 공공기관 등에서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버젓이 새치기하는 낯 두꺼운 사람들, 길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급행료를 내고 행정구청이나 법원 등에서 굳이 타인보다 빨리 민원서류를 받는 사람들, 땀 흘려 일하면 바보라며 한탕주의에 물든 사람들.

어제도 오늘도 지구 위에서 해와 달이 돌아가는 속도는 똑같다. 해와 달은 헐레벌떡 서둘지 않는다. 느리게 걷기를 모르는 이들. 그들이 세상의 일부분만이 아닌 삶의 진면목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안타깝기 짝이 없다.

# “평소 준비한 개인기술과 조직력을 있는 그대로 발휘했어야 했다. 공격, 수비, 중원장악력 모두 미흡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골 결정력이 부족했다.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 공격수와 수비 간 거리가 멀었다. 리베로가 없어 미드필더를 뺏겼다. 골 키핑력 등 개인기가 부족했다.”

다시 브라질월드컵 축구국가대표팀 평가전 얘기다. 미주 전지훈련에 참가한 선수들의 투혼은 빛났다. 국내파가 한국 축구의 현주소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진짜 매운 맛을 다 못 보여줘 아쉽다. 국내파 선수 위주 대표팀의 패인으로 축구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은 많다. 모두 맞는 얘기다. 혹자는 국내파 선수들은 기량이 부족해 유럽파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는 정치권에서 현재의 검찰 조직을 건실하고 중립적 독립적이 되도록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맨날 특검’ ‘특검하고 외치고만 있는 것과 유사하다. 유럽파도 이 땅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들이다. 유럽파로만 대표팀을 구성할 수 없고 당연히 국내파가 참여해야 한다. 다만 차제에 문제점을 정확히 짚고 향후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뿐이다.

대표팀은 감독에게 보여주기 위한 액션으로 힘을 엉뚱하게 소모하지 말아야 했다. 한국은 코스타리카를 10으로 꺾으며 안정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한 선수 한 선수 개인 기량은 우수했다. 선수들은 이 경기에서 전후반 내내 쉴 새 없이 뛰었다. 공격수도 수비지역에 내려와 체력을 너무 많이 썼고, 수비수도 오버래핑에 너무 자주 가담했다. 요즘 말로 오버했다. 그러다 보니 체력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치른 멕시코전과 미국전에서 정작 골을 넣거나 실점을 막아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는 몸이 무거웠다. 현저히 저하된 체력이 문제였다.

축구 팬으로서 한 가지 조언한다. 그것은 여유와 리듬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미드필드에서 상대팀이 압박해오면 당황하거나 허둥대기 일쑤였다. 볼을 패스하려 하면 길목은 이미 상대선수가 가로막고 있어 볼을 뺏기고 만다. 패스가 끊기다보니 슛을 할 기회가 없고 허겁지겁 수비하기에만 바쁘다. 어쩌다 공격기회가 생기면 장신의 김신욱 선수 머리를 향해 로빙볼을 올리는 고질적인 뻥축구를 하기만 했다.

브라질월드컵 본선에서 만나는 팀은 모두 강팀들. 우리가 무엇엔가 쫓기듯 빨리빨리병()’ 환자가 돼 공격 일변도로 서두르다가 한 방에 무너져서야. 먼저 수비부터 두텁게 형성해야 한다. 상대가 공격하다 스스로 팀워크가 흔들리도록 해야 한다. 한국팀 장점은 선수 개개인의 스피드와 순발력이다. 상대편이 얕잡아보고 공격해올 때가 오히려 찬스가 아니겠는가. 공격해 오는 패스의 맥을 끊고 볼을 인터셉터해 역습으로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전략이 가장 지혜롭다. 냉철함과 밸런스를 잃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보여준다면 꼭 성공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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