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생전에 사용하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집필실(왼쪽)과 응접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무숙문학관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주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 이해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았을까?

다산은 바람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지금 그것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 뉘라서 초여름의 훈풍을 청람이라 불렀던가. 녹색의 향기를 싣고 어지럽게 방향을 바꾸며 불고 있다. 강 건너에서 불어왔다간 강 건너로 불어 간다. 강 건너는 배알리, 셋째 형 약종이 묻혀 있는 곳이다.

기옥(羈獄)이며 삼구(三仇)의 하나인 육신을 벗어난 지 오래인 영혼이지만 때로는 돌아와 핏줄인 자기를 찾아오고자 하는 것인가. 언제나 그리웁고 사랑하는 향리의 향기로운 계절 속에서 다산은 차라리 마음이 비창하다.

잠시 잦던 바람이 또 불기 시작했다. 눈 아래 강기슭의 수양버들가지가 어지럽게 흩어진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엉키며 흔들린다. 바람이 잦다 일었다 하는 것은 자연의 기상 현상이지만 새삼 신비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문득 권진사의 여식 마리아가 포청에서 문초를 받았을 때 했더라는 말이 상기되었다.

관장이 천주학 신자를 문초할 때 으레 상투적으로 쓰는 순서로 천주를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리아는, “시굴 사람들이 임금님을 뵙지 못했다구 임금님 계신 것을 믿지 않습니까? 저는 천지만물을 보고 이것들을 만드신 지고의 임금님, 지고의 아버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관장이 버럭 화를 내며, “저 요망한 것이 망령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매우 쳐라.” 애처롭게도 마리아는 혹형을 받았단다.

그래도 그녀는 조용히, 그러면서 단호하게 “아무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오나 저 나뭇가지를 보십시요. 저렇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람이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천주는 엄연히 계시옵고 저는 뵙지 못하는 천주를 굳세게 믿습니다”하고는 기진하여 눈을 감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도 초여름, 포청 뜰에 서 있는 단 한 그루의 느티나무 가지가 푸른 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있었더란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논술에서 말하는 오류 중에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라는 것이 있다. 이는 ‘어떤 주장이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추론하거나, 반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이라고 추론할 때 발생하는 오류’인데 예를 들어서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이 없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거나 ‘피고인이 무죄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유죄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중요한 것은 검증할 수 없거나 검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대상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았다고(눈에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그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신(神)의 존재에 대해 부정할 때 자신은 신을 못 보았기에 신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의 눈에만 의지하는 자여, 당장 가서 수돗물을 한 컵 받아보라. 그 물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과연 아무 것도 그 안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가?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수돗물 한 컵에는 4종의 미생물, 11종의 무기물질, 17종의 유기물질, 10종의 소독제 및 16종의 심미적영향물질이 들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컵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이야기를 다시 인생에서 중요한 다섯 번째 만남으로 가져가보자. 종교지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道)을 알려주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는 밝은 영적인 눈(靈眼)을 가져야 하겠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추구해야 하는 종교지도자가 오히려 범인(凡人)보다 더 형이하학적인 경우가 수없이 많다.

쉽게 말해 진리가 아니라 돈이나 권세를 위해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는 종교의 경전(經典)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영안(靈眼)이 감긴 소경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성경(聖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태복음 15장 14절)

 

전맹(全盲)은 아니나 극도의 약시(弱視)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회적 맹인은 어렴풋이 색(色)을 분별한다. 그러나 영원한 암흑 속에 잠겨 사는 맹인은 색채를 모른다. 중간 실명자로서 빛과 색채와 형태를 본 일이 있는 사람도 실명 후 오래된 맹인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색채는 모르는 사이에 극히 주관적인 것이 되고 만다.

보았던 기억은 선명하나 오랜 세월을 보지 못한 그 황활하고 보배롭고 신비로우며 신성(神
聖)한 색채의 환상은 서서히 바뀌어져서 느끼고, 만지고, 듣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실지로 있으면서 있을 수 없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맹인에 있어서는 색채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이고 만지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다. 맹인의 색채는 언어(言語)이며 음(音)이기도 하다.

빨간색은 정열이며 C장조(長調)의 미(mi)다. 높고 맑은 음은 백색이고, 무겁고 낮고 탁하고 불쾌한 음은 까만 색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촉이 거칠고 딱딱한 석고(石膏)는 아무리 흰색이라고 일러 주어도 맹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맹인에게는 흰 석고가 까만색인 것이다. (중략)

실명후 오래 된 맹인은 일상생활에 그리 지장이 없다. 오래 함께 살아오면 아내도 잠시 남편이 맹인이라는 것을 잊을 때가 있다. 언젠가 박노인은 결이 좋은 나무에 반질반질 까만 칠을 한 작은 함을 맡긴 일이 있다. 얼마 후 박노인이 말했다. “언젠가 맡긴 그 예쁜 하얀 함 가지고 와.” “하얀 함이라뇨?” “왜 그 빨간 보에 싼 작은 함 말야.” “까만 함은 맡았어
두 하얀 함은 몰라요.” “아니 하얀 함이야. 아주 예쁜 거지.” 교동 아주머니는 다투다 말고 맡았던 남보에 싼 함을 내다주었다. 그러자 박노인은 함을 어루만지며, “사람 고집두, 맡아 놓구 아니라기는.” 했던 것이다. 아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 사람은 맹인이었구나…….” 맹인에게 있어 매끄럽고 고운 것은 ‘흰빛’이고, 그 까만 함은 매끄럽고 반질반질했다. 빨간 보는 느낌이고, 남색 보에 함은 쌓여 있었다.

- 한무숙, <어둠에 갇힌 불꽃들> 중에서 -


자신의 눈이 감긴 사실도 모른 채(경서의 참뜻도 모른 채) 그저 느낌으로 ‘이것은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하다가 이윽고 그 추측이 신념이 되어 진리로 믿고서 누군가가 사실(진리)을 알려주어도 여전히 눈 감고 귀 막으며 들으려고 하지 않고 우기는 존재와, <어둠에 갇힌 불꽃들>에 등장하는 박노인은 닮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멈칫멈칫하고 있는데 노인이 경상 위에 놓인 화류나무 토막을 들었다. 힘없이 보이는 하얀 고운 손으로 귓가에서 토막을 흔들자 찰칵찰칵 소리가 났다. 서너 번 흔든 후 손을 내려 토막 속에 들었던 가는 댓가지를 꺼낸다. 이윽고 노인은 또 조그만 화류통을 귓가에서 흔들고 댓가지를 또 하나 빼냈다. 이렇게 세 번 한 후, 통은 도로 경상 위에 얹고 댓가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댓가지에는 마디가 있는 모양이었다.

병호는 침을 삼키고 노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젊은이 이런 것 처음 보는 모양이군. 신기할 건 없어. 이게 산통(算筒)이라는 게야. 왜 산통깬단 말 있지않나. 산통을 깬다? 볼일을 다 봤다는 거지.”

- 한무숙, <어둠에 갇힌 불꽃들> 중에서 -


신약성경의 맨 끝인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이 나온다. 그런데 그 성에 들어가는 존재와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이중 점 치는 자(술객)는 성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점이 무엇일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장 15절)

인간과 종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지난 몇 달간 시국(時局)문제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종교계가 생각난다. 그 중 천주교가 가장 먼저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그들에게서 어둠과 함께하지 못하는 빛의 밝은 면을 본다. 암흑 속에서는 성냥불 하나도 밝게 보이는 법이다.

나는 비록 약하고 내가 가진 빛은 그리 밝지 못하나 나로 인해 내 주변은 조금이라도 더 밝아질 것이고 나와 같은 존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둠은 점점 물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빛을 가진 존재가 빛을 가진 또 다른 존재를 만날 때 악(惡)을 이기고 선(善)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만남이 중요한 이유이다.
 
김응용 객원기자

▲ 시아버지가 며느리 한무숙의 신사임당상 수상을 축하하는 뜻으로 쓴 글.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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