香庭에서 느낀 만남의 중요성 (2)
香庭에서 느낀 만남의 중요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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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무숙의 작품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무숙문학관

이제 남은 것은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다. 종교지도자의 머리 위에는 종교가 있다. 그러니 종교(宗敎)와 그 종교의 본질(本質)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바르게 이끌어 주는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 인간(인생)의 중요한 만남 중 맨 끝인 5번이자 가장 상위에 있는 만남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미션스쿨에 계신 목사님의 말씀이어서 종교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1900년대를 살다간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중 매슬로(Abraham H Maslow)란 사람이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설을 주도했다고 평가받는 그는 매슬로의 욕구단계설(Maslow'shierarchy of needs)을 주장했다. 인간욕구의 5단계설로도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은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위계상 다음 단계에 있는 다른 욕구가 나타나서 그 충족을 요구하는 식으로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다섯 가지 욕구는 바로 생리→안전→소속→존경→자아실현이다. 물론 생리, 안전, 소속, 존경, 자아실현과 부모, 동성 친구, 이성 친구, 배우자, 종교(종교지도자)를 일대일로 연결 짓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하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그 수준이 천지(天地) 차이다. 그런 것처럼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과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것에만 머무는 사람의 삶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이 걷는 길처럼 다르다고 하겠다.

한무숙의 장편소설 <만남>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순교자의 길을 당당히 걷는 것으로 자아실현을 이룬 초창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와 박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그의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은 모두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전통 유교 사상 안에 있는 천명 의식과 천주교의 하느님 신앙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이해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그 방대한 다산의 저서에는 표면상 어느 한구석에서도 서학 신봉자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대학자 다산은 어디까지나 위대한 경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젊었을 때 저술한 <중용강의>를 보면 그의 상제 사상이 최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천제에 대한 중국 고대의 경천(敬天) 외천(畏天) 사상에 근거를 두었다고는 하나 마테오 리치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또 <만천유고>의 발문은 간결하나 그는 그 간결한 글 속에 자신의 서교에의 귀의와 신앙을 압축 요약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다산을 ‘외유내야(外儒內耶)’니 ‘주유종서(主儒從西)’이 하는 사람도 있고, 마테오 리치의 소위 보유론(補儒論)적인 적응주의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는 외유내야 같은 혼합주의자도 아니며, 마테오 리치처럼 서학의 우위적 입장에서 유교에 적응하려는 보유론자도 아니다. 경학에도 서학에도 완전히 통달해 있던 그에게는 이 상반되는 것 같은 두개의 사상은 양자택일이 불필요했을 것이다.

서학과 경학은 완전히 대등하게 그 안에서 만나고 공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향리로 돌아간 후 다산은 손수 만든 괴로운 고대(苦帶)를 두르는 등 갖은 고신 극기로 마치 사막의 은수사(隱修士)처럼 천주교인으로서 신앙과 종교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유교인으로서 유교 전통에 충실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유교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치가들은 성리학적 전통에만 매달려 민생은 외면한 채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접한 서학(천주교)은 유교와 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실학적 입장과도 맞아 떨어졌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던 사람들은 볼 수 없었던 큰 세상을 천주교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땅의 천주교는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정조 때부터 시작했다. 정조 15년(1791)에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유교적인 전통을 거부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식 제례를 지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어서 이들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한국 천주교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하여서 일이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집권 세력은 새로운 학문을 용납할 수 없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불순한 세력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모진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헌종 5년(1839)에 일어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대표적이다.

먼저 신유박해는 벽파(辟派)가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것이다. 갑작스럽게 승하한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세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간 숨을 죽이고 있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대비는 벽파와 시파의 대립에서 벽파의 편에 섰던 사람이다.

급기야 순조 1년 대왕대비의 명으로 ‘사교(邪敎)와 사학(邪學)을 엄금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벽파는 시파 계통의 천주교도들에게 무차별적인 탄압을 가한다.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도 이 때 체포된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 저런 일로 마재를 찾지 못했던 하상은 오랜만에 보는 숙부의 수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라보게 쇠약해진 다산은 생애의 고난과 과로가 한꺼번에 들이닥치기나 한 것처럼 착 까무러지도록 쇠약해 있었다. 그런 애처로운 숙부의 모습을 보고 슬픔 속에서도 하상은 그 슬픔이상으로 어떤 의미를 느꼈다. 그는 교구 설정과 탁덕 영입에 드디어 성공한 기쁨을 전한 후 한참을 주저하다가, “이젠 탁덕을 모셨으니 성사(聖事)도 받을 수 있습니다.” 침중하게 말했다. (중략)

전날보다 더 수척해 보이는 다산의 얼굴에는 성사 준비로 상 위에 백포가 덮이고 중앙에봉안된 십자가 고상(苦像) 양편에 촛불이 켜지고 그 앞에 성수(聖水) 그릇과 성수채와 봉성체함이 놓인 후 탁덕이 중백의(中白衣)를 입고 자색 영대(領帶)를 걸 동안 불안과 공포가 서려 점점 더 창백해 가서 무사히 성사를 끝마칠 것 같지도 않았으나 탁덕이 성호를 긋고 성수를 찍어 방과 꿇어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며, “이 집에 평화-”하고 다시 성호를 그었을 때부터 차차 평온을 되찾아 갔다. 하상의 복사(服事)를 받으면서 유신부는 침착하고 경건하게 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나전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다산의 가슴은 뜨거운 감동으로 떨렸다.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기구와 의식은 시종 경건하게 정중하게 계속되었다. 이윽고 탁덕이 가만히 세 교우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고명(告命)의 차례가 온 것이다.

다산은 위대한 한학자이지만 중국말을 할 줄은 모른다. 방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었다. 필담으로 생애의 죄를 고하려는 것이다. 그가 고백한 죄과는 아무도 모른다. 천주만이 아는 영원한 비밀이다.

고명을 듣고 탁덕은 훈계와 보속을 필담으로 주었다. ‘갈봐리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달게 받아라.’ 이는 모든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속이었으나 다산은 이 말에 무한한 위안과 감사를 느꼈다. 천주의 인자함이 저리게 느껴져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는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제거됨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양심을 괴롭혔던 배교의 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느꼈다. 천주교인으로서는 물론 경학자로서도 그는 오상(五常)을 저버린 죄인이라는 의식이 항시 그를 괴롭혔었다. 진정한 경학자라면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의(義)와 신(信)을 저버렸던 것이 마음에 박힌 가시처럼 아팠었다. 이제 그는 고통이 보속이 되는 오묘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실로 그 숱한 기막힌 고통으로 하여 그의 보속은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다산의 얼굴은 밝아지고 준엄했던 표정도 사라져 증손자들과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같이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기해박해 역시 겉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였으나 안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는 벽파(辟派)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1834년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역시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개입한다. 정국은 순원왕후의 오빠인 김유근(안동 김씨)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라서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러다가 김유근이 은퇴하고 난 후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고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이때 다산의 조카인 정하상(정약종의 아들)도 순교한다.

기해년의 대교난은 여유당 뒤의 다산의 무덤과 강 건너 배알리의 약종의 무덤에 뿌리를 박고 푸른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아직마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인 다산의 사후 3년째 되는 해에 일어났다.

그 동안 하상은 여전히 교회 재건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홉 번에 걸친 고되고 험난한 연행길, 교우들의 지도와 단합과 구휼 자선 사업 등으로 앉을 틈조차 없었다. 그러한 열의와 노고로 갑오년(1834)에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를 영입하고, 이어 병신년(1836)에는 최초의 서양인 신부 모방을, 다음 해에는 샤스탕 신부를, 그 이듬해에는 제2대 조선 교구 주교 앵베르를 차례로 맞아들였다.

조선 교구는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시파에 속해 있었던 까닭으로 천주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이 세 프랑스 성직자와 정하상 등의 열절 교우들을 중심으로 날로 교세를 뻗어 가 모방 신부 입국시에 6,000명이던 교우 수는 기해년(1839)년 초에는 9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력은 날로 쇠미해 가고 있었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헌종을 위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헌종의 조모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보필하고 있던 그의 오라버니 김유근(金逌根)이 말조차 못하는 중병으로 마침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권은 당시 오직 한 사람의 재상이었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지연은 몹시 천주교를 적대시한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이 세도가로 대두한 헌종의 외척 풍양 조씨를 등에 업고 적극적으로 천주교 박해에 나섰고, 왕의 외조인 풍양 조씨 조만영은 그 아우 조인영과 더불어 안동 김씨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그러한 그를 철저히 이용하기로 하였다.

마치 신유년(1801)에 당시의 어린 왕 순조를 수렴청정으로 보필하던 정순왕후가 시파를 섬멸하는 수단으로 천주교 박해의 대옥사를 일으켰듯이 기해교난 역시 세도 다툼에 말미암은 희생이었던 것이다.

- 한무숙 ‘만남’ 중에서 -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응용 객원기자
 

▲ 김호기 관장이 어머니 한무숙 소설가의 삶과 문학을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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