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가대원 교귀발의 손자 교치용의 저택으로 교씨 집안 사람들이 250여 년 동안 거주했다. 1991년 영화 홍등(장예모 감독, 공리 주연) 촬영 장소로 유명해졌으며, 2006년 교치용의일대기를 다룬 45부작 TV드라마 ‘교가대원’이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사진제공: 왕인북스 손용식 사장)

창업신화 이뤄낸 불세출의 거상(巨商) 교귀발

‘l2014년엔 돈을 좀 벌어야지’하는 계획을 세우셨는지? 남몰래 다짐했든, 만인에게 공포했든 ‘돈’과 관련된 계획을 세웠다면 한번쯤 눈여겨볼 사람이 있다. 바로 17세기 중국의 상인, 교귀발이다.

교귀발(喬貴發). 교는 성이요, 귀발은 ‘귀한 부자가 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교’씨도 낯설거니와 이름에 ‘발’자가 들어가서인지 어감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교귀발을 알아본 두 사 람이 있었다. 교귀발 전기를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한 왕인북스의 손용식 사장과 퇴임 시 임직원에게 이 책을 선물한 최원표 전 한진해운 사장이다.

교귀발은 2004년에 한국 독자에게 처음 소개됐다. 당시 출판사 대표였던 손 사장은 책을 내기 위해 2000년도부터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에는 이미 교귀발에 대한 책이 7~8종 이상 나와 있었고 손 사장은 그 책들을 몽땅 사서 번역할 사람에게 맡겼다. 번역자들은 여러 종의 책 가운데 ‘하오루춘’이 쓴 책이 가장 잘 돼 있다고 판단했다. 4년의 잉태기간을 거쳐 2004년 7월에 하오루춘의 교귀발이 한국어로 출판됐다. 같은 해 9월 최원표 전 한진해운 사장이 퇴임을 하면서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100여 명의 임직원에게 선물했다. 한국의 두 남자 마음을 사로잡았던 교귀발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수소문 끝에 찾은 손 사장은 당시 책을 출판했던 동기를 “한국이 중국을 너무 모르고 뛰어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기업이 중국에 굉장히 진출을 많이 했다. 그런데 100개 중 98개는 실패했다. 중국을 너무 쉽게, 만만하게 봤던 거다. 그래서 중국 상인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을 소개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하자, 그렇게 찾았던 인물이 교귀발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책의 원제목은 ‘진상제일교’ 중국 발음으로 찐상띠이치아오. 진상에서 으뜸가는 교(교귀발)란 뜻이다. 보통 부자가 3대를 가기 어렵다는데 교씨 집안은 7대까지 갔다. 또 유일하게 창업자의 유지가 후대까지 잘 전해진 모범 케이스다. 교씨 집안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고, 당시 중국 국영방송 CCTV에서도 춘절(우리나라의 설날)특집 프로그램으로 여덟 명의 상인을 재조명했는데 그 첫 번째가 교귀발이었다”고 말했다.

▲ 교귀발 한글판 도서 기증식 왕인북스 손용식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한국어로 번역된 교귀발 도서를 교가대원에 기증했을 당시 사진. 마이크 앞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당 서기이고, 원 책의 저자 하오루춘은 오른쪽 끝에 서있다. 손 사장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준 백제 왕인과 같이 한중일의 문화교류를 이뤄내고자 하는 뜻에서 ‘왕인북스’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사진제공: 왕인북스 손용식 사장)

◆하늘이 길들인 혈혈단신의 고아

귀발은 여덟 살에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열한 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고 단란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외동아들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교씨 집안에 남은 사람이라곤 귀발 하나였기 때문에 결국 외삼촌댁에서 살게 됐다. 더부살이의 서러움, 귀발은 일찍이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다. 사촌형은 놀고먹으면서 서당 가서 공부해도 귀발은 그럴 수 없었다. 콩 갈고, 두부 만들고, 두부 팔고, 돼지 먹이고, 청소하고…. 사람이 맷돌을 가는 것인지, 맷돌이 사람을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일하고도 “어린 게 어찌나 잘도 먹어대는지!”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밥을 먹을 땐 외숙모에게 돼지 취급 받아야 했고 항상 거친 밥, 남은 밥이 귀발의 몫이었다. 어쩌다 밥이 부족하면 굶어야 하는 것도 귀발이었다. 똑똑한 것도 남의 집에선 흠인지라 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귀발은 5년 뒤 외삼촌댁을 나와 자신이 살던 집, 짧지만 행복했던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환이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금환은 귀발의 아버지와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의 딸이자 그 동네에서 손에 꼽히는 야무지고 참한 처자였다. 금환 역시 귀발을 좋아했지만 돈도 부모도 없는 귀발과의 혼인을 금환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결국 돈 때문에 부잣집 아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귀발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성공해서 돌아오리라는 굳은 각오를 안고…. 귀발도 몰랐으리라. 왜 그토록 상처와 앙금으로 범벅이 됐어야만 했는지. 하지만 시련은 신의 한 수, 귀발의 어린 시절 고통은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다. 또 가난 때문에 뼈에 사무치도록 아파본 만큼 부를 축적한 후에도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귀발은 많이 배우지 못했다.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다였다. 다만 귀발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근검절약, 적덕행선(부지런하고 사치를 피하며 아껴 쓰라, 덕업을 쌓고 선을 베풀라)’이 여덟 글
자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귀발은 부지런했고 영리했다. 고향을 떠나 처음 했던 일은 낙타몰이. 낙타몰이는 생명을 담보로 해 큰 수입을 얻는 일이었다. 계속한다면 경력도 쌓이고 돈도 모을 수 있을 테지만 평생을 낙타몰이꾼으로 살 수는 없었다. 그는 북방의 작은 마을에서 적은 자본으로 나물장사, 두부장사 등을 통해 자립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마음 맞는 동업자와 함께 북방의 다른 마을 ‘포두’에 자리를 잡아 건초장사와 객점을 운영했다. 귀발은 두 사람에게서 은근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의 적대감은 매우 편협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같은 업종의 가게가 어느 정도 몰려있을수록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귀발은 자신을 경계하는 상대방을 보며 저 정도 안목이면 경쟁대상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발이 포두에서 사업을 시작하려했을 때 기존 상인들은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귀발은 장사를 배운 것도 아닌데 모두가 더 잘될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두 사람이 작은 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는 것보다 세 사람이서 큰 솥의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더 이익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발의 말대로 촌락에 불과하던 포두는 밥그릇 자체가 커져 교역의 중심지,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귀발은 매사에 사리판단이 빨랐고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의 총명함보다 더 빛났던 것은 그의 도량(度量)이었다. 귀발에겐 적이 없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그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았다. 넓게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다.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장사고, 반드시 신의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귀발은 “장사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신의는 뿌리이다. 서로를 의지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잎이 되고, 그 결실이 바로 돈이다”라고 생각했다.

▶2편에 이어집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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