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오경은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

흔히 유교의 경전이라 하면 사서삼경(四書三經) 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일컫는데 이는 유교의 경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책들이다.

사서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네 개의 경전이며,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痙)’ ‘주역(周易)’의 세 경서를 뜻한다. 여기에 ‘춘추(春秋)’와 ‘예기(禮記)’의 경서를 포함한 것이 오경이다.
조선시대 찬란한 유교문화와 함께 양명학·성리학·실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학문연구가 있게 된 것도 이들 경서를 바탕으로 한 결과다. 이들 경서를 바탕으로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 등의 성리학자와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의 실학자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유교라는 종교와 학문으로서의 유교 경전에 대해 논하려면 앞서 언급한 경전 외에도 많은 책들과 학문을 논해야 하나 이 자리에서는 사서오경과 유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 현대에 와서 재편찬된 사서. ⓒ천지일보(뉴스천지)

 

사서(四書)의 유래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합해서 사서라고 한다. 송나라 때 정자라는 사람이 오경 중 하나인 공자가 편찬한 예기에서 대학, 중용을 분리해 논어, 맹자와 함께 엮어내 사서로 만들었다. 그 전에는 오경이 주로 읽혀졌으나 내용이 어려워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송나라 때부터 편찬된 사서가 중시되기 시작해 원나라 때는 고시 과목으로 중시됐다가 명나라의 영락제에 의해서 사서대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주자(주희)는 사서대전에 평생작업으로 주해(주석)를 달아 사서집주(史書集註)를 냈다. 이를 토대로 한 사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사서를 배울 때는 먼저 대학을 읽고 학문의 깊이를 정한 다음 논어에서 근본을 배운다. 이어 맹자에서 그 발전을 터득한 후에 마지막 중용에서 선인들의 높은 사상을 음미하는 것이 대체적인 순서다.

 

사서(四書)의 내용

사서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대학(大學)’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예기 49편 중에서 42편을 별책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이후 주자가 ‘대학장구’를 만들어 경 1장, 전 10장으로 구별 지어 주석을 가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 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한다.

또 격물치지(格物致知: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지식을 완전하게 함)·성의(誠意: 일을 정성껏 하는 태도나 마음)·정심(正心: 올바른 마음)·수신(修身: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아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제가(齊家: 집안을 바로 다스림)·치국(治國: 나라를 다스림) 하면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평정한다) 할 수 있다는 8조목(八條目)으로 정리해 유교의 윤곽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대학은 초학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호(門戶)로 여기며, 대학을 배우고 나서 논어와 맹자를 배워야 거의 오차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논어(論語)’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 불리는 중국 최초의 어록집인 공자 언행록으로 공자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책이다.  여기서 공자는 인(仁)에 대해 일관되게 말한다. 인(仁)이란 자애로움·친근함·인정(人情)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공자 이전 시기에 인(仁)은 군주가 백성에게 보이는 친애의 뜻으로만 풀이됐지만 공자는 인(仁)의 의미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완전한 덕성을 나타내는 말로 확대시켰다.

‘맹자(孟子)’는 맹자가 공자의 뜻을 진술해 ‘맹자’ 7편을 추가로 저술한 책이다. 여기서는 공자가 언급하지 않는 내용도 당시 상황에 맞게 순응시켜 부가했다. 공자가 인(仁)만 말한 것을 맹자는 의(義)를 덧붙여 설명하고 있고,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해 패도(覇道: 힘으로 나라를 통치)를 배격하고, 절제를 강조했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의 내용도 들어 있다.

마지막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서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중용은 ‘예기’에 있는 ‘중용편’이 송나라 때 단행본으로 내려온 것이다.

여기에서 ‘중(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용(庸)’이란 평상시를 뜻한다. 이치에 맞고 불변하지 않는 상태, 즉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의미한다.

중용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고,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이 바로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오경(五經)의 유래

 

▲ 현대에 와서 재편찬된 오경의 일부. ⓒ천지일보(뉴스천지)
오경(五經)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경전인 ‘서경(書經)’ ‘시경(詩經)’ ‘역경(易經)’을 의미하는 주역(周易) 삼경을 포함해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총칭하는 말이다.

 

경(經)이란 말은 본래 날줄로서 피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데, 뜻이 변해 사물의 줄거리 또는 올바른 도리란 의미를 지니게 됐다. 따라서 오경은 성인(聖人)의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되는 변하지 않는 가르침이 담겨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즉,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인지에 대한 해답은 모두 오경 속에 구비돼 있다고 여겼으나 내용이 워낙 까다로워 송나라 이후 사서에 비해 호응을 얻지 못하게 된다. 

오경을 경으로 칭하고 권위를 높인 것은 순자(荀子)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오경이라는 용어가 성립된 것은 전한(前漢)시대 무제 황제 때에 유교 관학으로 삼고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던 것에서 비롯됐다. 후한시대에 와서 반고가 ‘백호통의’에서 오경이라는 말을 쓰면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오경(五經)의 내용

먼저 시경(詩經)은 춘추시대의 민요(民謠)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詩集)이며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나 미상이란 주장도 있다. 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해 통치자의 전쟁과 사냥, 귀족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과 일상생활 등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당시의 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로 많이 쓰인다.

서경(書經)은 중국의 요순 때부터 주나라 때까지의 정사(正使)에 대한 문서를 수집해 공자(公子)가 편찬한 책이며 상서(尙書)라고도 한다. 서경의 일부는 후대에 와서 기록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꼽힌다. 초반부에는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舜)왕의 말과 업적을 기록했고, 후반부에는 BC 10세기경 은(殷)나라의 건국과 몰락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역경(易經)인데 주역(周易)이란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고대 중국의 철학서 육경(六經)의 하나이다. 주역은 후세에 철학, 윤리,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연구하는 경서이다.

만상(萬象)을 음양 이원으로써 설명하고 그 으뜸을 태극이라 하였고 거기서 64괘를 만들어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역은 흔히 점을 보는 점서(占書)라고 부르는데 크게 경(經)과 전(傳)의 두 부분으로 돼 있다.
경은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를 여섯 개의 선으로 된 그림에 설명을 붙여 그 각각의 그림을 괘(卦)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64괘이다. 서죽(三竹)과 산목(算木)을 써서 그림을 구해 길흉을 판단한다.

다음 예기(禮記)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禮)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기술한 책이다. 주례(周禮)와 의례(禮儀)와 같이 예 자체를 기술한 책은 아니지만 음악, 정치, 학문에 걸쳐 예의 근본정신에 대해 기록돼 있다.

특히 예기는 변하는 시대성에 부응할 수 있는 예에 관한 이론과 해설을 모았다는 점에서 중시됐다.
마지막 춘추(春秋)는 사건의 발생을 연대별과 계절별로 구분하던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해 공자가 죽기 직전까지 노(魯)나라의 12제후가 다스렸던 시기의 주요 사건들을 기록한 책으로 ‘춘하추동’을 줄인 이름이다.

 

▲ 주역 64괘 모양(왼쪽)과 일람표(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시대의 학문적 변천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가장 꽃피우게 된다. 이때 조선의 유교 학문에 가장 영향을 준 건 주자학(송나라 주희)과 양명학(명나라 왕양명)이 있으며, 이 두 개를 묶어 송명이학이라 부른다.

주자학은 ‘경물(敬物)’을 주장, 객관적인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먼저라 하고, 양명학은 주자학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치양지(致良知)’, 즉 주관적인 사람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우선이라 주장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조선 초기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 이어져 조선 중기에 성리학 융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이 서경덕, 이언적,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조식, 김인후 등이다. 이언적은 최초로 무극태극(無極太極) 문제를 논한 학자이며, 서경덕은 중국의 기론(氣論)을 도입한 학자이다. 이황은 주자학의 정통을 계승해 호발설(互發說)을 주장했고 이이는 한국 성리학을 정립해 일도설(一途說)을 주창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급격한 당파 싸움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당파싸움으로 율곡의 이기론(理氣論)과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에 대한 이견 차이가 있다.

주리론은 이(理)는 기(氣)의 활동의 근본이 되고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기론은 주리론에 바탕을 둬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순 없지만 동시에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도 이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 해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후기는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 발달한다. 실학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두었으나 성리학의 모순을 비판한 학문이다.

이 중 율곡에 뿌리를 두고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의 후진성을 개혁하자고 주장한 실학의 한 학풍을 북학파라 하였는데 박지원, 박제가가 이에 포함된다.

이와는 반대파인 퇴계에 뿌리를 둔 유형원, 이익의 뒤를 이어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이후 실학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와 김홍집 등의 온건개화파로도 나뉘게 되고 동학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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