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 광렬이 그린 조지훈 ⓒ천지일보(뉴스천지)


◆영양, 문향을 피우다

청송에서 차로 약 1시간을 달리면 영양이 나온다. 영양은 ‘문향의 고장’으로 통한다. 그런 만큼 근·현대 문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문인이 많이 출생한 곳이다. 영양 주민들 스스로가 ‘자연과 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고장’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서정시인 오일도에서부터 청록파 시인 조지훈, 현대 소설가 이문열, 최근에는 정재숙과 황명자, 강용준 등에 이르기까지 결코 적지 않은 문학인들이 영양 출신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일도의 감천마을, 조지훈의 주실마을, 이문열의 두들마을 등이 지역 문학인들의 출생지와 지역 문화재를 엮어 만든 문학마을이 곳곳에 있다.

지난달 21일, 주실마을의 겨울 아침은 차분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가지를 하늘로 치켜 벌린 나무 한 그루가 주실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마을은 조선 중기 때 환난을 피해 온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다. 시인 조지훈도 한양 조씨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한양 조씨가 오지로 내려온 배경엔 기묘사화가 있다. 중종 14년(1519) 훈구파는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를 경계하면서 급기야 숙청했다. 조광조의 친족인 호은공 조전은 한양을 떠났고 1629~1630년 사이 가족들과 함께 지금의 영양 주실마을에 정착했다.

▲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천지일보(뉴스천지)

마을 한복판엔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경상북도 기념물 제178호)이 있다.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저택인 ‘ㅁ’자형이다. 호은종택 대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붓 모양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 이 봉우리는 문필봉으로 불린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봤을 때 문필봉이 있는 곳에 문인, 학자가 배출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 역시 이러한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환경뿐만이 아니다. 조지훈의 가족력을 보면 그가 왜 곧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단번에 알게 된다. 조부인 조인석(1879~1950)은 6·25 당시 인민군에 항거하다가 자결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구한말 의병장 남주 조승기가 있다. 이처럼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선인들은 자연스레 어린 동탁(조지훈의 본명)의 마음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이 즈음해서 조지훈이 국문학적으로 어떠한 위치였는지, 어떻게 지조론을 쓰게 됐는지 한번 짚고 가보자. ‘시인 조지훈’을 던져놓으면 곧 ‘청록파’‘승무’가 따라온다. 그렇다. 앞서 말한 것 같이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유명하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익숙한 ‘승무’를 작시(作詩)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승무’전문 -

청록파 가운데서도 그는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인물이며,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리고 ‘지조론’에서 볼 수 있듯 당대의 논객이요, 한국민족운동사와 한국문화사서설 등 한국학 연구에 있어서도 큰 획을 그은 학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지조론’이 눈에 들어온다. 골자는 ‘선비이고 지식인이고 지도자라면 지조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여진 수필은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정치계를 쥐락펴락하는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글이다.

▲ 아들 광렬이 그린 조지훈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지조는 역사의 객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해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이를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만약 삶의 기준과 가치관을 바꾸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좋은 방향일 때에 도리어 지조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지훈은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면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며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변절은 무엇인가. 단순히 가치관이나 노선을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경우를 말한다.

조지훈과 관련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이자, 그리고 사람들은 조지훈을 숨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죽음을 관조한, 그래서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인물로 기억한다.

조지훈은 멋을 중요하게 여긴 동시에 신념 역시 매우 강조했다. 그에게 멋은 곧 신념이다. 어쩌면 조지훈이 승무, 무고 등 우리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리네 참다운 미학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욕심은 일찍이 그 아름다움을 찾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부터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것을 지켜왔기에 그 저항과 신념의 유전자가 조지훈의 정신과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은 아닐까.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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