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993년 거란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멘붕상태에 이른 고려 조정에 서희가 있었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적진에 뛰어든 서희는 고려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을 섬기지 않으면 고려를 정벌하겠노라고 협박하는 소손녕을 설득해 철군케 한다. 이어 여진족을 몰아낸 뒤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고려 영토에 편입시킨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후 처음으로 우리의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당시 특사(特使)를 자청해 거란을 상대로 실리외교를 벌인 서희의 눈부신 활약이 없었다면 한반도 역사는 어떻게든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 역사는 뛰어난 유세사들을 전하고 있다. 근세의 특사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역할을 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다. 1971년 닉슨의 특사로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 미중 국교정상화를 이끌어내고 데탕트 시대를 활짝 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그 후 박철언 대통령정책보좌관, 서동권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이어 2000년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첫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켰다. 이처럼 특사(特使) 외교는 교착 상태에 빠진 국가 간 현안을 비공개 독대 공간에서 정치 외교적으로 타결 지어 세계사 흐름을 바꿔 놓는 승부수가 되기도 한다. 특사 교환. 남북관계와 한일관계가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며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하나의 묘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행되지 않는다.’ 북핵6자회담이 횟수를 거듭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북한은 영리하게도 90년대 초부터 강석주-갈루치 회담테이블 너머에서 핵개발 시간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NPT탈퇴, 지하핵실험, 미사일발사 등 초강수를 시간차로 구사했다. 이어 금강산관광객 피살,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사건 등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다. 서방은 중국 채널을 활용한 외교적 방안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것도 북중관계에 냉기류가 흐르면서 큰 성과 없이 지지부진한 과정만을 되풀이한다.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외교정책이 벽에 부닥친 상황인 것이다. 그간 핵개발을 막는 데만 급급하다보니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것도 같다. 아무래도 북한급변사태에 대비하는 한편, 개혁 개방 및 통일기반 조성이라는 방향으로 초점이 유지돼야 할 텐데.

문제는 앞으로도 북한이 어디로 튈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개선을 언급했던 북한은 최근 키리졸브 훈련에 반발하며 이산가족상봉 행사도 보류했다. ‘북한이 비핵화조치를 하면 대북제재 해제 및 외교 경제적 협력이 가능하다는 미국 주도의 기존 핵억지 정책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의구심마저 드는 상황이다. 필자 개인 견해이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북핵 보유 사실을 인정하면 절대 대북 정책을 펼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북핵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등 새 틀을 짤 필요성도 생긴 상황이다. ‘통일한국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세계의 주도국이 될 수 있으려면 남북이 북핵문제라는 장애물을 넘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산가족 상봉은 이뤄져야 하고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는 필수적이다. 무엇보다도 조속히 남북 정상이 만나야 한다. 두 정상이 모든 현안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해야 한다. 남북은 서로 사이가 틀어져 두 눈 부릅뜨고 마치 가정법원에서 만난 남녀처럼 냉랭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남북대치는 누구 좋은 일 시키는 일인가. 미국의 무기판매업체,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아닌가. 언제까지 대책 없고 희망 없는 빙하기? 아무튼 남북 특사 교환부터 검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면 미국은 누구 편을 들 것인가. 아베 일본 총리는 아베노믹스로 국민의 박수를 받고 있는가. 영토, 역사인식, 군 위안부와 일제 강제징용피해자 배상, 신사참배 문제 등에서 왜 주변국을 자극하며 우경화를 재촉하는가. 한일 간에는 북핵문제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그런데도 한일정상회담은 당분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래 가장 냉각된 관계가 아닐까. 21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양국 정상은 만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갈 수 있겠느냐고 해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 가능성을 일축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더 부강하며 자위대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훨씬 막강하다. 동시에 지정학적으로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우방이다. 북한정세 정보 교류 등 안보 분야 협력과 통일 시대를 이끄는 동북아 안정을 위해서도 외교 경제적 협력은 필수적이다. 대화가 단절되면 두 나라에 모두 손해이고 불행이며 어리석음이다. 교착 상태인 외교 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됐으면 한다. 남북관계와 한일관계에 키신저같은 인물이 어서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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