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곽거병의 부대는 언제나 정예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참 부장의 부대라 하더라도 병졸, 군마, 병기 등이 곽거병이 거느린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곽거병은 그 강력한 기병과 함께 언제나 본대보다 앞장서서 용감하게 적 깊숙이 쳐들어갔다. 게다가 그의 부대는 한 번도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고참 부장들은 언제나 불운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로 인하여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지더니 마침내 대장군 위청을 능가할 기세가 되었다.

흉노의 혼야 왕은 서부 지역에서 번번이 한나라 군대에 패하여 수만 명의 병졸을 잃었다. 모두 곽거병의 군사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몹시 화가 나서 그 해(기원전 121) 가을, 혼야 왕에게 출전을 명했다. 이에 대해 혼야 왕은 휴도 왕 등과 공모하여 한나라에 항복할 결심을 하고 사자를 보내어 우선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는 한나라 군대에 그 뜻을 전했다.

때마침 한나라 대행령 이식 장군이 황하 유역에 성을 쌓고 있었다. 이식 장군은 혼야 왕의 사자를 맞이하자 즉시 역전거를 띄워 무제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무제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항복을 가장하고 들어와 변경을 습격할 우려는 충분했다. 무제는 곽거병을 불러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맞이하러 갈 것을 명령했다.

곽거병의 군사는 황하를 건너 혼야 왕의 부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혼야 왕의 부장들이 동요하면서 도망갈 기색을 보였다. 그것을 보자 곽거병은 혼야 왕 진영에 뛰어들어 왕과 만나고 도망가려는 병졸 8천 명을 베어버렸다. 곽거병은 혼야 왕을 역전거에 태워 무제에게 먼저 보내고 자기는 항복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귀로에 올랐다. 그 때에 항복한 흉노는 수만 명을 헤아렸다.

장안에 도착한 곽거병에게 무제는 거액의 은상을 내리고 혼야 왕에게는 1만호의 봉지를 내려 탐음후에 임명하고 부왕 호독니를 하마후로, 웅비를 휘거후로, 금리를 하기후로, 대당호 동리를 상락후로 각각 임명했다.

이어서 무제는 곽거병의 공을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표기 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서역 왕 혼야와 그 부하들을 모두 우리나라에 귀순시켰다. 군량미는 적의 양식을 빼앗아 충당하고 병졸은 강궁의 1만여 명을 편입했다. 반항자는 죽여서 머리와 포로를 합쳐 8천여를 얻었고 이국의 왕 32명을 항복시켰으며 더구나 우리 장병들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10만의 항복한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한나라에 귀속해 온 것이다. 우리 장병들은 거듭되는 토벌전을 잘 견디어 주었다. 그리하여 황하 연안으로부터 요새 밖에 이르는 곳에서 백성의 고통은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려하고 있다. 이로써 표기 장군 곽거병에게 1천 7백 호를 가증함과 동시에 농서, 북지, 상군의 주둔군을 반감하고 백성들의 노역 부담을 경감하노라.”

그로부터 얼마 뒤 한나라는 귀순해 온 흉노를 변경 5군의 옛 요새 바깥에 나누어 옮겨 살게 했다. 그들은 모두 오르도스의 땅에 있으면서 옛날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한 채 한나라에 귀속했다.

원수 4년(기원전 119) 봄. 무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 장군 곽거병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규모의 흉노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들이 이끄는 기병은 각각 5만, 보병, 치중병 수십만 명이 후속 부대로 뒤따랐다. 이때에도 정예 부대는 모두 곽거병의 군에 배속되었다.

원래 곽거병은 정양을 근거지로 선우와 싸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포로의 말에 의하면 선우는 동쪽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무제는 급히 작전을 변경하여 곽거병에게는 동쪽에 있는 대군에서 출전하라고 명령했다. 정양에는 위청의 군대를 보내고 전장군에 낭중령 이광, 좌장군에 태복 공손하, 우장군에 주작도위 조이기, 후장군에는 평양후 조양을 각각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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