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새해 들어 며칠 지나지 않은 이때쯤이면 사람들마다 기대치가 많다. 그러면서 복잡하고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이야기보다는 밝고 아름다운 뉴스를 듣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 신문이나 TV보도에서 지겹도록 들어왔던 암울한 사건들에서 벗어나 애써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함은 기대를 가졌던 지난 일들에 대한 회의감도 일부 작용하고 있다. 지난 세월 우리는 많은 일에 관심을 가져보았지만 좋은 날의 기억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해가 바뀌자 지도자들이 쏟아내는 신년사들이 매스컴을 장악하고 있다. 그 내용들은 기대를 잔뜩 늘어놓아 희망을 꿈꾸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고 꽃노래 타령으로 허허롭게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올 한 해도 온 국민이 힘과 지혜를 모아나간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희망의 새 시대’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말 등이다. 실체가 없는 기대치 정도의 바람이나 형용사로 부풀린 내용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 기부를 한 미담이나 보고난 뒤에도 가슴이 찌릿한 영화 한 편, 또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인간미 풍기는 고생담이 더 솔깃하다. 작년 자선냄비 모금액이 사상 최고 액수인 63억여 원이라는 것, 새해 첫날 가족과 함께 본 영화 ‘변호인’이나 추신수 선수의 성공 신화가 그렇다. ‘변호인’ 영화가 보여준 정의감,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게 권력이 아니라는 것, ‘국가란 국민입니다’는 말은 당연하다. 권력자들이 국민을 한낱 피치자로 몰았던 어두운 시대의 잔상은 현재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아 있음을 경계하는 대목이다.

한편, MLB(미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간 1억 3000만 달러(약 1371억 원)에 계약한 추신수 선수가 작년 연말 귀국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미국메이저리그 선수로서 당당함을 보이면서 앞으로의 야구인생을 살아가는 가장으로서의 ‘가족’, 선수로서의 ‘도전’과 인생사에서 ‘나눔’의 심경을 말했다. 추 선수는 연봉 1000만 원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힘들어하던 아내가 “고생 그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던 미국생활 초기에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봤기에 오늘의 영광을 거머쥘 수가 있었는바, 그의 진솔한 이야기가 향기처럼 퍼진다.

운동선수나 기업가 등 고생 끝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간미가 묻어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들어봐도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졸부의 아들딸로 별 어려움 없이 커왔거나 재산 상속으로 거부가 된 재벌 2, 3세들의 이야기는 사회에서 크게 어필되지도 않거니와 설령 화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일시적 화제일 뿐 두고두고 교훈이 되는 사례로는 남지 않는다. 거기에는 눈물 젖은 빵의 사연과 인간적인 향기가 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추신수 선수는 만 31세 나이로 벌써 세 자녀를 둔 가장이다. 그가 이번에 성사된 계약에서 첫째 조건은 이기는 팀이었지만, 가족이 얼마나 그 지역에서 편안하게 사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토로했는데 이것이 가족 사랑의 면면이다. 텍사스와 계약이 이루어진 당시 새벽 1시 30분, 그는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기쁨을 함께 했는데 아내가 눈시울을 적셨다면서, “미국생활 13년 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 회상했다.

그렇듯 비록 젊은 운동선수의 이야기지만 추신수 스토리는 올 한 해 갑오년을 열심히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아무리 연봉이 센 MLB이라고 하지만 그의 성공신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지난 1년 동안 신시내티팀에서 낸 개인통산 성적 최고의 출루율(0.423)은 성실한 훈련과 치열한 경쟁의 결과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 자만이 거둘 수 있는 수확인데, 이는 철저한 직업 정신과 가족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특히 추신수 선수가 장하게 여겨짐은 “사회봉사를 위한 나눔과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에서다. 자신이 혜택을 입고 받은 만큼 사회에 기부한다는 그의 마음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아마 추 선수가 미국에 살면서 기부 문화가 일반화된 미국사회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으리라. 국가·사회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려는 일들은 다반사이고,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풍토가 우리 현실에서는 아쉬울 뿐이다.

정작 우리 사회는 국가·사회의 도움을 받아 윤택해진 거부들은 기부를 못 본 체 하기 일쑤다. 더욱이 모 재벌은 형제 간 재산 다툼으로 법정 소송을 벌이며 서로가 누워서 침 뱉기 하는 웃기는 세상에서 이제 31세 난 추신수 선수가 밝힌 ‘기부의 미덕’은 기특한 일이다. 추 선수의 아름다운 가족에 대한 사랑, 사회를 향한 나눔의 철학, MLB 선수로서의 도전정신은 인간적인 향기로 우리 사회를 밝고 훈훈하게 만들게 하려는 새해 벽두의 신선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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