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나훈아의 ‘고향 역’에 등장하는 고향 역은, 코스모스 피어있고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는, 그래서 달려라 고향 열차 하며 가슴이 설레는,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 역이었다.

이제는 코스모스 피어 있는 고향 역을 보기도 힘들어졌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나의 고향 역 같은 곳도 별로 없다. 고향 역에는 이쁜이 곱분이도 없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그리운 나의 고향 역은 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무지막지하게 커진 새로운 역들이 들어서고 있다.

올드한 세대들에게 기차는 슬픈 구석이 있다. 영화에서도 노래에서도 기차역은 십중팔구 이별의 장소다.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달려가는 기차를 따라 달리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현실도 그러하여 겨울날, 여름 모시옷을 입은 어머니가 서울로 가거나 군대에 가는 아들을 눈물로 배웅하기도 하였다.

김수희가,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리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 사랑도 흐르네, 라며 우리를 즐겁게 하였지만, 자신의 또 다른 노래 ‘정거장’에서는 여자인 내가 기다려야지, 라며 체념하고 만다. 기차로 연인을 떠나보낸 슬픔을 노래한 하남석의 ‘막차로 떠난 여인’에도 사람들은 폭풍 공감하였다. 느낌 아니까!

증기 기관차와 전철,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에 이어 마침내 케이티엑스까지, 기차가 빨라진 만큼 세월도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마트한 세상을 사는 요즘 세대들은, 기차라면 당연 케이티엑스인 줄 알고 그렇게 쌩쌩 달려야 기차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소주병과 수박 덩어리를 들고 지고 대성리로 엠티를 갔던 아저씨 아줌마들에게는 케이티엑스보다 새마을호나 무궁화호가 더 정이 간다.

빨리 달리는 것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많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기차가 들고나는 아름다운 시골 기차역을 보기 힘들어졌고, 기차를 타고 가며 볼 수 있었던 정겨운 풍경들도 보기 어려워졌다. 기차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거나 엿을 먹이던 아이들도 볼 수 없다.

기차는 쏜살보다 더 빨리, 그렇게 달리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고, 사람들은 기차가 과연 제 시간을 지키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시계를 들여다 볼 뿐이다.

이런 감상도 시절 좋은 이야기다. 영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기차는 벚꽃이 휘날리거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그리운 고향 역을 달리는 정겨운 기차가 아니다. 영화 속 기차는 가혹하고, 우리 현실도 그처럼 가혹하다는 걸 일깨워 준다. 영화 속 기차에 탄 인간들은 불평등했다.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덩어리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과, 우아한 사람들이 같은 기차를 타고 있었다.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했던 그들은 싸웠고 마침내 질주하던 기차도 멈춰 서고 말았다.

기차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나라에서는 기차 회사를 따로 더 만들어 기존 열차와 경쟁시키겠다는 것이고, 노조는 결사반대다. 민영화가 되면 ‘설국열차’ 꼴 난다. 분명하다. 민영화는 안 될 소리고, 정부도 민영화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노조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 국민들도 진실을 잘 모른다.

우선 멈추어야 한다. 수서발 케이티엑스 사업을 멈추고, 과연 그것이 민영화인지 아닌지, 국민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평행선을 달리는 게 기차의 속성이지만, 마주보고 달려도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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