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서호의 물빛 파란 9월엔, 달빛도 갑자기 흐릿해지네(九月西湖碧, 明月忽減色)’. 근대 중국의 유명한 만화가 풍자개(豊子愷)가 1936년 8월에 그린 한 폭의 만화에 붙인 화제이다. 서호의 녹수청산과 단교(斷橋)의 긴 제방에 두 그루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보름달이 높이 걸려있다. 장포(長袍)에 마고자를 걸치고 단삼(短衫)을 입은 4명의 행인이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정면의 담장에는 <동북실지도(東北失地圖)>가 걸려있다. 화가는 매서운 필체로 몇 번의 거친 붓질을 가하여 일본이 중국의 동북3성을 강점한 ‘9.18사변’을 묘사하여 중국인들에게 적개심을 불어넣었다. 대일항전에 나서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름다운 서호의 풍광보다 <동북실지도>에 집중되고, 높이 뜬 밝은 달도 빛을 잃고 넋이 나간 표정이다.

풍자개는 절강성 동향(桐鄕) 출신으로 처음에는 산문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중국의 만화 창시자로서의 족적이 더 뚜렷했다. 1914년, 절강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설립자 이숙동(李叔同)의 미술과 음악에 반했다. 이숙동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동음화회(桐蔭畵會)’라는 그림 동아리와 ‘동지(東砥)’라는 금석전각 동아리에 가입시켰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1918년, 이숙동은 호포사(號跑寺)로 출가하기 전에 자신이 아끼던 화구와 작품을 모두 제자에게 주었다. 풍자개도 불문에 귀의하여 홍일(弘一)이라는 법명을 얻은 스승의 뒤를 따라 ‘영행(嬰行)’이라는 법호를 얻었다. 1924년 일본에서 귀국한 풍자개는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료였던 주자청(朱自淸)에 따르면 풍자개는 주사위처럼 작은 방안에 만화원고를 가득 걸어 두었다고 한다. 1925년, 상해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풍자개의 만화에는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다. 고시(古詩), 어린이의 삶에서 각종 사회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만화에 스며들었다. 신문화운동에 주력하던 정진탁(鄭振鐸)은 주필로 있던 <문학주보>에 풍자개의 만화를 연재하는 동시에 ‘자개만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 공식적으로 만화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정진탁이 최초였다.

1931년 일본이 동북3성을 강점하자, 노신(盧迅),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등이 상해를 중심으로 언론의 자유를 위해 단결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풍자개도 서명했다. 이 선언문은 중국공산당이 항일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풍자개는 예리한 붓으로 대담하게 과장, 비유, 상징, 우화 등의 기법을 동원하여 유머와 풍자가 넘치는 화면에 국민당정부의 통치하에 암울한 중국의 현실을 비판했다. 가운데에는 서호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2월에 서호가 얼면 호반에는 고난이 가득하다(西湖二月氷, 湖畔多苦辛)’ ‘5월에 서호가 푸르면, 산마다 두견새가 운다(五月西湖綠, 山山杜鵑哭)’ ‘누가 서호를 보고 아름답다 하는가? 곳곳에 낚싯밥만 가득한데(誰言西湖好, 處處有釣餌)’와 같은 작품은 모두 서호 주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두운 면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만화가 날카로운 투쟁의 무기임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풍자개는 서남지방으로 피난했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마일부가 항주에 세웠던 복성서원(復性書院)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정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집권하자 상해로 이주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항주에 있었다. 1954년, 스승 이숙동의 유해 일부를 항주로 옮겨 호포사 뒷산에 묻고 기념탑을 세웠다. 문혁 기간에도 풍자개는 공산당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이 열렬한 사회주의 만화가는 사인방으로부터 무지한 박해를 받았다. ‘온 산에 단풍이 드니 처녀가 나무를 한다(滿山紅葉女郞樵)’는 국기인 삼면홍기를 비난했고, ‘배안에서 봄 풍경을 바라보니, 물속에 복사꽃그림자가 비치네(船裏看春景, 水中桃花影)’는 인민공사를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풍상을 거치는 동안 풍자개도 늙어갔다. 1972년 말에야 자유를 찾아 항주로 돌아갔다. 새봄에 조용히 나들이에 나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세운 홍일대사기념탑이 홍위병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보고 낙담했다. 평생의 지기 마일부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제2의 고향 항주가 이제는 회한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1975년 9월 15일, 풍자개는 상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홍일대사기념탑이 복원되었지만, 세상을 떠난 풍자개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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