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서울 관악구지회. 사진 왼쪽부터 안수옥 지회장, 임덕식, 양재수, 노문우 씨. ⓒ천지일보(뉴스천지)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서울 관악구지회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우리 병력 2개 대대가 적 5개 사단에 포위돼 일주일간 공격을 받는데 실탄도, 식량도 다 떨어지니까 풀 뜯어 먹으면서 버텼지요.”

13일 6.25참전유공자회 서울 관악구지회 사무실에 모인 노병들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6.25전쟁 당시 숱한 전투에 참가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었던 임덕식(82) 씨에게 전쟁의 참상은 지금도 꿈에 나타날 정도로 참혹했다. 1950년 12월 대구에서 일주일 훈련을 받고 전방에 투입될 때만 해도 그가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러야 할지 알지 못했다.

죽음의 고비는 용문산 방어를 맡은 6사단 결사대에 선발되면서 찾아왔다. “후퇴하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하겠다”는 엄중한 명령을 받고 전투에 나섰다가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이었다.

“매일 밤 포탄, 기관총을 적이 쏴대는데, 머리를 들 수가 없어요. 골짜기에 쫙 깔린 중공군이 꽹과리 치고 피리 불면서 총공세를 해왔지요. 닷새가 흐르니까 먹을 것도 떨어지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고, 참호는 전사자 때문에 그대로 묘지가 됐어요.”

약간 흥분된 임 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수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북받친다. 이 전투로 그가 속한 대대 병력 800여 명 중 3분의 1이 전사했다.

“실탄도 떨어지고 죽음을 기다리는 꼴이 되니 피눈물이 났죠. ‘부모님, 나라 위해 먼저 갑니다’라고 빌었어요. 그때 분대장이 ‘하루만 더 버텨라. 내일 아군이 총반격을 할 것’이라고 했는데, 다음날 새벽 동 틀 때 유엔군 쌕쌕이 전투기가 나타나더니 중공군에 포탄을 퍼부었죠. 전세가 역전되고 우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요.”

양재수(81) 씨도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기억을 더듬었다. 1952년 12월 동해안 전방 부대에 수색대로 배치돼 한밤중에 수색을 나갔다가 기습공격을 받았다. 총소리가 비 오듯 했다. 바닥에 나뒹굴던 그는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총소리가 멎자 누군가 2명이 다가왔다. 인민군이었다.

“탕탕! 총 두 방을 쏘고는 아군 쪽으로 정신없이 내달렸어요. 새벽쯤 분대 호에 복귀해 전우들을 끌어안고 울었죠.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줄도 몰랐어요.”

육군 5사단에 배치됐던 정상렬(82) 씨도 1953년 7월 휴전 직전 강원도 화천 평화의댐에서 중공군 2개 군단에 포위돼 부대가 거의 전멸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들 노병에게 전쟁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씻기 어려운 상처다. 전투 자체에 대한 참혹한 기억도 있지만,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크다. 안수옥(80) 지회장은 “이북의 어려운 실정을 보면 하루빨리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통일을 어떤 식으로든 우리 세대에 꼭 이뤄서 죽기 전에 통일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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