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년 한국 전통 예절을 지켜온 강영숙 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35년동안 예절 교육을 이끌어온 강영숙 원장을 만나다

올해로 35주년을 맞은 한국 전통 예절 교육의 근원지 ‘예지원(禮智院)’. 지난 16일 예지원 기념행사를 통해 강영숙 원장을 만났다. 

52년의 긴 세월을 어찌 한 번의 만남으로 다 알 수 있으며 그동안의 노력과 피땀의 결과를 감히 어떻게 정의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열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육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었던 귀여운 막내딸’이었다. 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웠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MBC아나운서 1기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특별한 계기를 통해 ‘한국 예절 문화 교육기관’을 처음 창시해 운영하는 동안 있었던 기막힌 사연들과 경험담을 모두 들어봤다. 

 ‘예지원’을 들어오자마자 눈에 띈 것이 현판 글씨였습니다. 직접 쓰셨다 해서 무척 놀랐습니다. 서예를 어느 정도 하신 것인지, 글씨에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는 저를 무릎에 앉혀놓고 붓글씨를 가르쳐주시곤 했어요.

그런데 붓글씨에 권태를 느낀 적이 있었어요. 먹을 갈아야 하는 것이 어쩜 그렇게 싫던지. 그래서 아버지께 ‘먹을 갈지 않고 물로 쓰면 안 될까요?’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좋아서 물로 글씨를 썼죠. 좀 있다 아버지께서 보시더니 ‘글을 어디에 썼는고’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쓴 글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물은 다 말라 버리잖아요. 그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래서 먹으로 써야 남는 것이야’ 하시면서 먹을 가는 이유를 알게 해주셨어요. 바로 인내심이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께 한자를 배웠어요. 그래도 한자는 늘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아나운서가 돼서 방송국에 들어가게 됐는데 글을 읽을 때 한자가 들어가니 이해도 잘되고 해서 독학으로 꾸준히 공부해왔는데 지금은 큰 재산이 됐죠.

 

▲ 예지원 강영숙 원장ⓒ천지일보(뉴스천지)

 

그렇다면 원장님의 한자 사랑과 ‘예지원’의 창립 취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지난 이야기들이 듣고 싶습니다.

한자를 꾸준히 배운 덕에 간판을 직접 쓰게 됐어요. 그때는 간판 만드는 돈도 없고 해서 하얀 판에다가 검정 페인트로 글씨를 쓴 것이 ‘예지원’의 로고가 된 것이죠.

그때가 35년 전인데 한글로 쓰라고 했던 사람이 많았지만 한자로 써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예지원의 뜻이 그냥 예술적인 것이 아니고 예의와 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자가 아니면 뜻이 통하지 않거든요.

요즘은 식당이름도 있고, 연예인 이름까지 있죠? 한글로 했으면 홍보도 많이 됐겠지만 한자로 풀이하면 뜻이 다 다르니까요.

그런 뜻으로 1974년도에 예지원을 개원하게 됐어요. 개원하기까지 사연이 참 길어요. MBC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일본 신문에 난 것을 제 방송에서 읽게 됐는데 70년대에는 한국 경제문제와 사회질서가 많이 문란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관광산업이 일본사람들에게 기생관광으로 인식이 된 글을 읽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이후에 관광공사 사장을 직접 찾아갔죠. 기생관광 말고 다른 방법을 연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건의를 드리고 기획을 써 낸 것이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외국인에게 소개하고 체험하게 하므로 관광인식을 바꾸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는데 그때 일본에서 예도가로 유명한 ‘오가사하라류(小笠原流)’라는 단체를 처음 알게 됐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국의 다도를 보고싶다’고 하는 거예요.

전 충격에 빠졌죠. ‘다도’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거든요. 그래서 한국의 ‘다도’ 역사를 찾아보니 일본의 ‘다도’는 500년의 역사고 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 ‘다도’의 기록이 있더군요. 그리고는 불교문화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그 뿌리를 찾아 다녔는데 그때 안광석 선사를 만났게 됐죠.

그때 엄청 야단을 치는 거예요. 아나운서가 ‘입만 살아서 나불대면 안 되지!’ 하시면서, 처음으로 그렇게 야단맞아 봤어요. 그래서 ‘다도’를 급히 배워서 일본 ‘오가사하라류(小笠原流)’ 단체에게 보여주게 된 것이죠. 이런 역사 속에서 ‘다도’를 시작한 것은 아마 요 근세에는 ‘예지원’이 처음일 거예요. 재흥을 시켰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35년이 되다 보니까 전국에 대학교마다 ‘예절’과 ‘차 문화 학과’ 등이 많아졌죠. 마침내 한국기생관광문화가 예지문화관광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예지원을 35년이나 이끌어 오시면서 쉬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처음 예지원의 창립을 함께 구상했던 육영수 여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많이 혼란스러웠었지요. 예지원이 개원하기 전 일이었는데, 개원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충격을 받고 마음이 아파서 헤매고 있는데 서울 동덕여고 김재영 선생에게 전화가 왔어요. 강연을 해달라기에 처음엔 거절했지만 해주게 됐죠. 강연이 끝나고 내가 예절교육을 할 만한 장소가 없어 걱정이라는 말을 듣더니 바로 남산에 있는 대원정사라는 곳을 찾아가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 일찍 대원정사를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회장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늙은 노인에게 “마음의 교육을 하는 곳이 필요해서 왔다”고 말하고는 연락처를 남겨두고 와 버렸어요.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가 장경호 회장님이었던 거예요.

이러한 황당한 만남을 통해 예지원 설립장소를 마련하게 됐어요. 그분은 “내가 이 건물을 지워놓고 임자가 없었는데 이제야 임자가 나타났다”며 건물을 사용하라고 했어요. 저에겐 아주 좋은 장소였죠.

 

▲ 지난 16일 예지원 창간 35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만난 강영숙 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럼 현재 예지원에서는 다도 외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문화가 또 어떤 게 있나요.

70~80년대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을 때 예지원 회원들에게 했던 말이 “여행 갈 때 그 지역에 한국문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 문화를 다른 나라에 소개하자”고 제의를 했었어요.

그래서 또 하나를 기획했던 것이 한국인의 한평생 의상을 생각했었죠. 돌 옷부터 나이별로 복식(服飾) 기획을 세운 것이죠. 의상소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인생 역사가 소개되는 거라 많은 외국인들이 좋아했었어요.

그래서 예지원은 외국에서 더 유명해요. 현재도 꾸준히 교육을 하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마음이 있는 곳에 예(禮)가 있다”

강영숙 원장은 예절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한국문화 보급에 대한 강한 열정과 예절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끝으로 강 원장은 “예절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그것이 참 예절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요즘 제사를 지낼 때 돈 많이 들여서 마음 없이 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돈 들여서 마음없이 하는 것보다 냉수 한잔 떠놓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절하는 게 더 나은 것 아니겠냐”며 현 세대 젊은이들의 예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꼬집으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마음이 있는 곳에 예가 있다. 예(禮)를 학문적이나 지식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배우는 예가 참 예(禮)”라며 말을 맺었다.

현재 35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 전통 예절 교육기관 ‘예지원’에서는 예절과 관련한 모든 분야의 강의와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생활예절에서 복식, 요리, 가정의례, 차 생활 예절, 상례, 제례, 혼례, 여행 에티켓, 서식예절, 세시풍속, 언어예절, 우리 가락과 춤 등 전통예절에 대한 문화기행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한국사람뿐 아니라 외국사람들에게도 교육을 하고 있다. 현재 30여만 명의 한국 제자와 천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다녀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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