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화합과 종교 간 상생’이란 시대적 요구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일부 종교계의 시대착오적 발상이 사회와 종교계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기독교의 성시화 운동을 후원하고 있다는 광고가 게재돼 논란이 일고 있다”는 등의 기사가 요즘 각 종교 및 일반 언론의 주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겉으론 화합과 상생을 외치지만 사실은 공권력까지 동원, 사회와 국가를 기독교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소위 ‘성시화 운동’이 그 주범이다. 이 운동은 종교의 자유, 공직자 종교편향금지를 위한 개정 법령이란 국법을 완전 모독하는 일이며, 이와 같은 운동에 앞장선 자들이 과연 누구인가를 정부는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사실인즉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권력을 지키고 유지하고 포교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하나 된 특정종단이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권력과 하나 되어 진실한 기독인마저 핍박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단체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고 사람의 말과 장로들의 계명을 지키는 단체다.

왜냐, 하나님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하라 했지 저주하고 훼방하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자기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고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키는 일에 방조하는 등 일정부분 혐의가 인정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범법자를 개종 전문가라는 미명아래 성시화운동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바로 이를 잘 증명하는 것이며,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이 나라와 종교의 앞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뒤늦게 임의로 후원 명칭을 사용했다는 사과를 함으로서 일단락은 되었으나 그 이면의 진정성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와 관련된 제보와 유사 사건이 계속적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또한 ‘성시화’라는 말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전국 여러 도시의 관청 안에 ‘시무협의회’라는 성시화 추진단체들이 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선진문화대국을 꿈꾸는 나라에서 16세기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의 마녀사냥을 일삼았던 제네바의 성시화운동을 오버랩 시키려는 이 시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각성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들의 기막힌 성시화운동의 기본방침으로 된 문서에는 ‘하나님의 도시를 지향하고 있기에 그 곳에 사는 시민은 개신교 신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주 할 것인지 양자택일 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성시화운동의 최종 목표인 셈이다.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신들의 하나님에 불과할  따름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예수의 도(道)를 왜곡시켜 공의공도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서지 못하게 훼방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며 참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장로교의 창시자이며 종교개혁자로 이름 붙여진 칼빈은 종교를 개혁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개혁’이란 이름을 앞세워 내 사상, 내 말, 내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굶기고, 화형에 처하고, 교수대에 매달고, 톱으로 목을 자르고, 그 지역에서 추방하며 참으로 씻을 수 없는 만행으로 중세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남긴 인물이다.

그렇게 하여 만든 도시가 바로 이름하여 제네바의 ‘성스럽고 거룩한 도시’라 명명한다. 500여년 전 그 망령이 이 강산 위에 다시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개혁’이란 의미는 잘못된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옳고 바르게 고쳐 세우는 것임을 왜 모른단 말인가. 오늘날 이 나라는 법이 있으면서도 법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묻고 싶다.

성시화를 위해선 개종이 필수적인 요소다. 개종시키지 못하면 그 지역에서 내쫓아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 증거가 성시화운동의 일환으로 개종전문가가 이단세미나를 개최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성시화운동은 반인륜적이며 반사회적이며 반종교적인 처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종교인은 종교 본연의 역할을 깨달아 그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끝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으로 화합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며 애쓰는 것이 절대자가 진정 바라는 종교인의 자세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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