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국가정보원이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앞세운 중도실용정책과 소통이란 기치가 국민들에게 잘(?) 받아들여져 지지율이 50%를 상회하는 등 모처럼 국정운영에 대한 활기찬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설마 국정원이 그런 돌발적 대응을 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뉴스사이트를 뒤적여보니 불행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더구나 박원순 변호사가 17일 국정원의 소송제기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과 이로 인한 파장을 살펴보니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닌 듯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 국정원의 소송제기는 득보다는 실이 큰 실책이다. 필자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에서 문제 삼는 ‘중도실용의 진정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실용’이라는 의미있는 어젠다를 선점해 막 자신감 있는 국정드라이브를 걸려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자칫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행보에 대해 무조건적 반대는 아니더라도 판단을 유보하고 있던 중간세력들에게 “역시 이명박 정부는 말로는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뒤로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로의 회귀를 꿈꾸는구나”라는 판단을 내리도록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두 번째는 시민사회진영의 재결집과 집단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권의 숱한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유연한 시민운동에만 전념해오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정치사회적 입지를 굳힌 인사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마당발이라는 웬만한 기성 정치인을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촛불세대들에게도 매우 호감도가 높은 인물이다.

세 번째, 정치공학적으로 보아 유력 대권 주자 대망론에 목 말라 있는 야권에게 새로운 다크호스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박근혜, 정몽준 등 기라성같은 유력주자를 보유한 여권이 이번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마저 총리지명 카드로 가로채가는 바람에 망연자실해 있던 야권으로선 이번 사태가 박원순 변호사라는 휴먼 주자를 일으켜 세울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선출직에 대한 미련이 없음을 수차례 천명했던 박 변호사가 만약 마음을 바꿔먹는다면(아직까지는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여당으로서는 큰 낭패일 수 있다. 그는 야당이 아직 포기하지 않은 서울시장 후보감 중의 한 명이다.

네 번째, 이미 박 변호사가 지적했듯이 국가기관이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이 법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명예훼손죄는 개인의 인격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 단체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게 다수 법학자들의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과거 한나라당의 입장과는 배치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2003년 권력기관이 시민 등을 상대로 거액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이른바 ‘전략적 봉쇄소송’을 제한하는 입법을 추진한 바 있다.

이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과 4개 언론사를 상대로 3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이를 비난하며 내놓은 대응전략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측은 “대통령이 언론과 야당 의원을 상대로 무차별 거액 소송을 잇달아 제기함에 따라 앞으로 표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며 이 법안의 입법 필요성을 주장했다.

국정원의 이번 소송은 국정원에 대한 추가적 문제제기를 가로막으려는 ‘전략적 봉쇄소송’의 한 전형으로 보일 여지가 많다.

국정원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위해서라도 이번 소송을 즉각 취하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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