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26. 두루마기를 빨아 입고 생명나무가 있는 성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 거룩한 성은 어디에 있으며, 거룩한 성에 있는 생명책에 녹명된 적이 있는가?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두루마기를 빨아 입고 생명나무에 있는 성에 들어가려는 자는 들어갈 자도 아닐 뿐더러도 그 성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자이다. 당연히 생명책에 명단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자신이 예수님 십자가 위력 안에 놓인 것을 믿는 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루하루 생활을 자꾸만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하루요 세월이라고 생각하니 지금 주님께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시키고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증거케 하는 하루하루를 보여주기 위해 생존하는 세월임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살아있다는 나를 산 채로 천국으로 밀어 넣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소용없는 짓이다. 천국은 ‘나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입장된다. 나의 이름이란 나의 역사를 의미한다. 내 뜻을 이루겠다는 것은 범죄다.

인간은 원래부터 피조물이다. 창조주를 위하여 존재하지 결코 자신의 행복이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서는 아니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영위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저주다. 인간은 ‘나 답다’는 것을 확정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속임수를 써본다. 나 아닌 나를 계속 외부에서 찾고자 하고 그것을 모방하여 획득하려고 추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기만에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정말 나다운 모델도 모르는 가운데 끊임없이 새 모델을 구하여 바꿔치기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매일 같이 ‘나는 이대로의 나를 진정 인정 못 하겠다’는 속임수 같은 것이다. 이 속임수가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도록 부추기고 그래놓고는 그 오류의 탓을 자기를 향한 그들의 속임수에 있다고 핑계될 참이다.

‘여기 절대적으로 살아가는 나를 봐 달라’는 외치고 싶어서 즉 자신이 자신을 향하여 벌리는 속임수에 타인들을 끌어당겨놓고서는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면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살도록 만들었으니 당신네들이 나쁘다’고 항의할 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즉 말씀을 매개로 하여 내게로(예수님에게로) 건너올 수 있다면 건너와 보라는 말씀이다. 제자리에서 평생 자신을 위장하는 것으로 세월 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던져주신 말씀을 건너서 예수님의 나라 이쪽으로 합류될 수 있거든 해보라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자기 쪽에서 자비를 베풀어 ‘원수’를 아예 안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예 원수가 없다고 여겨서 말씀 자체를 무효화 시켜서 해결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방법은 이렇다. ‘성도=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롬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 원수 된 자 앞에서 십자가 피를 뒤집어쓰시고 나타나신다. ‘네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노라!’ (행 9:5 ‘나는 네가 핍박하던 예수니라’)

악마가 보고 싶다면 자기 모습을 보면 되고, 지옥이 보고 싶다면 이 세상을 보면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한복판에서 피투성이채로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셨다. 그곳이 바로 거룩한 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2~14)’

생명이란 곧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한 죽음을 의미한다. 스데반집사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셨다. 이 죽음은 단순히 목숨 빼앗김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대장질’하는 것을 포기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즉 ‘누가 더 높은가’를 포기하는 것이 그 방향성으로 보여주는 고난의 모습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사셨던 방향성이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9)’

이 고난에 참여된 자가 곧 생명책이 기록된 자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SOSTV 생애의 빛]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 말씀의 원어의 뜻을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는데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이라는 구절의 원래의 뜻은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즉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옷에 묻은 점과 티를 제하는 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 묻은 죄와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성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한 성은 어디에 있을까? 현재 이 땅 위에 있을까? 지금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뒤에서 조종하며 세계의 종교까지 통합하려고 있는 로마가톨릭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바티칸 시국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외에도 여러 신종 기독교 단체에서도 자신들의 교주를 모신 곳이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새 예루살렘 성이 현재 이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으며 이 지구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될 때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 2)’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실 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처소를 예비하여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계시록에서는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예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우리가 들어갈 새 예루살렘 성은 현재 하늘에서 건설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늘에 있는 예수님과 새 예루살렘 성이 언제 어떻게 내려오느냐 하는 것이다. 일부 신흥기독교 단체의 말대로 보이지 않게 예수의 영이 어느 누군가에게 임하여 그 사람이 거한 곳이 새 예루살렘 성이 되는 것인가? 그렇게 따지면 새 예루살렘 성은 우리나라에서만도 수십여 곳이 된다. 그러므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 장면을 아무도 오해하지 못하도록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 21:2)’

사단은 예수님의 가시적인 재림과 실제적인 새 예루살렘 성의 건설을 방해하기 위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의 영이 보이지 않게 어느 누군가에게 임했고 그 곳이 새 예루살렘 성이다’라는 거짓말을 해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양 떼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재림의 징조로 아래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수차례 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6, 27)’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본 질의는 계시록 22장 14절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계시록 22장은 계시록의 대미(大尾)이자 전체 성경 66권의 결론 장이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궁극이기도 한 천국에 대한 묵시와 그리스도의 재림사상의 핵심 진리를 보도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그 가운데 14절은 12절에서 보도한 약속에 대해 결론으로 제시된 말씀이다. 12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고 하였다. 즉 14절은 성도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받게 될 영광의 상급과 연관된 말씀이다.

두루마리에 대한 보도는 계시록 6장 11절에서도 나온다. 거기서는 주를 위해 희생당한 성도들이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하나님께 신원(伸冤)을 호소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여기서도 두루마리는 주님을 위해, 혹은 복음을 위해 희생한 성도들의 삶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두루마기란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계 3:18에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하셨다. 역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교훈에서 ‘흰 옷’을 비유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의의 행실, 진실된 삶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됨이 합당하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그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라고 하였는데, 이 성은 21장 1절에서 보도한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가리킨 표현이다. 그것은 계시록 22장이 신천 신지에 대해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란 새로운 성지로 설명해주고 있는 21장부터 연속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에 있는 생명책에 녹명된 적이 있는가란 질의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책에의 녹명은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책은 ‘어린 양의 생명책(계 13:8)’을 뜻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을 자들에 대해서 엡 1:3에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셨다고 하였다. 즉 성경은 오직 창세 전에 선택된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 받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서정에 대해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미리 정해 놓은 자들만이 부르심을 입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다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7)’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따라서 생명책에의 녹명은 현재 받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난 호에도 소개하였지만 주님은 중생과 관련하여 그렇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무엇이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너희는 값으로 사신바 된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kjv)’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하고 있다. 육신으로 벌레와 구더기 같은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거룩한 도성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어 갈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한 방울의 거룩한 피도 없는 것들이 죄가 없는 거룩한 분과 연합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주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이 땅 위에 살아갈 동안 두루마기(흰 세마포)를 아무리 빨아서 입는다 해도 이 땅 위의 것들 즉 물도 더러운 것인데 더러운 오물로 흰 세마포를 빨았다 한들 그 옷을 입고 거룩한 도성에 들어 갈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주셔야 가능하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 의한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소서(엡 5:26)’

잔치집에 초청을 받은 자는 초청자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잔치에 참석해야 한다. 우리가 준비한 깨끗한 옷을 입고 거룩한 도성에 들어 갈 수 없다. 교회시대에 도성은 교회가 도성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그리스도시며 생명나무이시다. 죄인들이 모이는 곳, 하지만 의롭다 인정하시는 예수 그리스가 도성이 되셔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을 보여주니라(계 22:1)’는 말씀은 교회에서 역사하신다.

처음부터 계시록은 7교회에 말씀을 선포한다. 그리고 다시 계시록 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교회들에 관한 이런 일을 너희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었노라’라는 말씀을 하게 된다. 진리의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계명들을 행한다. 이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아직도 교회 안에 바벨론의 누룩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다. 예배당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나무에 관한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자들, 거대한 누룩에 부풀린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통하여 팔자를 고치려 하는 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문으로 들어가지도 못하여 담을 넘어 들어갈 것이다. 개들과 마술사들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 살인과 우상을 숭배하며 거짓으로 하나님 말씀을 자기화하여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도성 밖에 있을 것이다(계 22:14~15).

결국 도성 밖은 지옥이라 말하겠지만 하나님을 믿어도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안에 있지 못하면 주님 오실 때 당연히 거룩한 도성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도성은 현재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다. 인간이 주인이 된 교회는 거룩한 도성이 될 수 없다. 등록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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